그날도 원래는 시폰만 들고 올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불허. 그런 고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제게도 닥쳤습니다. 눈 앞에 놓인 저 먹음직, 아니 때깔좋은 몽블랑을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였지요. 진지하게 고민하였지만 카드는 제게 긁어달라 유혹했고 저는 그 유혹에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먹은 몽블랑이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는 것도 다 잊고, 안젤리카의 몽블랑이 상당히 맛있었지만 먹은지 오래되어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있던 겁니다. 밤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밤이 나올 계절이 아니라는 것도 유혹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간증하는 듯한 분위기....-ㅅ-)

이날은 G와 퇴근길에 만나 같이 퇴근하기로 하였습니다. 제 볼일이 먼저 끝나 G의 퇴근시간이 되기 전에 G의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그리하여 그 회사의 카페에서 부푼 마음으로 케이크를 열어 사진을 찍었습니다.(어?)

(거기 전망이 정말 멋지더군요. 빌딩 주인에 로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좌케이크우시폰. 케이크 케이스는 제일 작은 것이 저것인가봅니다. 광택나는 반짝반짝한 빨강에 검은색 스티커를 붙여 고정했습니다.




고정은 이리 했더군요. 케이크가 움직이지 않도록 두꺼운 종이로 된 보호대를 씌웠지만 몽블랑의 특성상 케이크는 망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점은 조금 아쉽지만 덜렁 덜렁 들고다닌 제 탓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검은색은 아이스팩을 넣은 부직포 주머니입니다.)




위의 풀은 무엇인지 몰라 과감히 버렸습니다. 허브라면 덥석 입에 넣었겠지만 보통의 허브와는 모양새가 다르군요.
저 아리따운 자태는 모자에 깃털을 단 로빈훗의 자태와도 같...(중략)




꺼냈습니다.
아쉽게도 앞의 면발은 뭉개졌지만 그렇다 하여도 저 자태는 변하지 않습니다. 밤크림을 짜서 컵 위를 덮고 그 위엔 가볍게 거품을 낸 생크림이 올라갑니다. 그 위에는 속껍질째 조린 밤조림이 살포시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저의 충동구매심을 자극한 것은 주황색의 곰탱이입니다. 레몬빛 꿀단지에 매달린 주황색 곰. 푸(Pooh)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못지 않게 깜직합니다.



수, 숨이 넘어갈 것 같아요!

(밤조림 만드는 법은 리틀 포레스트 1권에 있습니다. 올 가을엔 한 번 만들어 볼까 생각중인데 평소처럼 생각만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훗)




이정도로 썼으면 이제 슬슬 본래 말투로 돌아가야죠.
저렇게 고이 잘 모셨던 허니 몽블랑(7천원)은 그 이틀 뒤엔 저런 모습이었습니다. 금요일에 구입하고 그 다음날 먹었는데, 출근하면서 가방을 흔들었던 것이 문제였던지 저렇게 크림들이 다 으깨졌습니다. 아깝다 생각하며 컵에 달라 붙은 밤크림을 긁어먹었는데 굳어서 그런지 조금 뻑뻑합니다. 아주 부드럽게 녹아내리지는 않습니다. 진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예요.

먹으면서 저 케이크의 단면도를 그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릇 맨 아래에는 파이가 들어가 있습니다. 타르트가 아니라 파이. 겹겹이 파이결이 살아 있는데 바삭하고 부드럽게 부서지진 않고 적당히 단단한 파이입니다. 저는 이런 파이도 좋더군요. 그리고 속은 스폰지와 커스터드 크림이 번갈아 들어 있습니다. 밤크림도 끝까지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고요. 그리 달지 않기도 하거니와 단 맛이 설탕 단 맛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꿀맛입니다. 밤크림을 조금 긁어 입에 넣었을 때부터 이건 꿀이다라고 외치고 있었으니, 진짜 꿀입니다. 게다가 역시 아주 달지 않은 커스터드 크림, 스폰지의 비율 등이 꽤 취향이었습니다. 밤크림은 뻑뻑하지만 아래 커스터드 크림이 있으니 거슬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밤크림과 커스터드 크림이 이리 잘 어울릴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더 사다 먹고 싶다는 심정을 자금 난조로 꾹꾹 누르고 있으니, 번거로움신이 보우하사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번거로움신과 게으름신과 체력난조신과 기력딸려신이 동시 강림하시면 그 어떤 케이크라도 견뎌낼 수가 없겠지요. 게다가 월급날이 꽤 남았음에도 통장잔고신은 저 멀리 계시니, 아무리 지름신과 먹자신이 오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몽블랑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밤크림을 원하신다면 커스터드가 들어간 허니 몽블랑은 사도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니 그런 점을 감안하셔서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컵은 잘 씻어서 제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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