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에만 올리고 까맣게 잊은 이야기.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143438&novel_post_id=71822



내...년이 아니라 올해 목표 중 하나는 이 이야기의 본편에 해당하는 용과 도서관을 쓰는 겁니다. 대강 어떤 방향으로 보낼지는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네요. 꾸준히 쓰는 것이 목표. .. ..하지만 G4는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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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rary is best place to find the cat – feat. by Ed Sheeran, ‘Shape of you’


일리히가 언제 학당에 왔는지는 백운이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 꾀죄죄하고 작은 꼬마가 다 떨어져 가는 신발에 낡은 옷을 입고 학당으로 오는 길을 걷고 있던 걸 발견한 게 백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백운은 륜이 간밤에 도서관 저 멀리에서 귀인이 오는 꿈을 꾸었다며 밖으로 쫓아내는 바람에 불편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던 참이었다. 억지로 밀려 나왔지만 4월의 날은 따뜻했으며 봄이 오고 있다는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지다 보니 부루퉁한 마음도 걷는 사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리고 새싹들을 만끽하며 간만의 산책을 즐기던 와중 학당으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리히란 이름을 얻은 어린 장수족은 백운에게 발견된 덕에 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장수족의 생태는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가 쉽지 않다. 일설에는 인간과 다른 생장 속도를 보이는 이를 통칭하여 장수족이라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에 인간형의 모든 종족을 포함할 것이냐, 아니면 이족보행이 가능한 종족을 총칭할 것이냐는 이견이 등장하면서 결국 의견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하여간 장수족은 사례연구만 가능하며 그런 사례연구마다 다르고 또 같은 부분이 각각 나타나서 일반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다. 일리히는 그런 장수족 중에도 특이한 경우로, 처음 학당에 왔을 때는 열 살 남짓으로 추정했으나 실제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으며, 그 상태로 몇 년 정체되어 있다가 4년째부터 점차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넷 전후의 외모를 가졌을 때 또 한 번 성장을 멈췄으며, 그 다음에는 5년이 지나서야 다시 성장했다. 약관을 갓 넘긴 외모를 하고 있을 때는 이미 서른을 넘겼으며 그 뒤로는 나이 세는 것을 멈췄다. 이미 그 전부터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니 나이를 세는 것이 무의미 한데다 나이 세는 것을 포기한 존재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멈춘 것도 있었다. 소륜학당의 창립자로 용(龍)인 륜의 나이는 학당의 나이에서 역산이 가능하지만 같은 용(龍)인 백운은 그보다도 훨씬 위다보니 계산이 쉽지 않았고, 학당의 기록관장을 맡고 있는 신수(神獸) 제로디안도 나이 추산은 가능하지만 밝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학당은 나이가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리히의 담당 업무는 참고봉사 또는 레퍼런스 서비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참고봉사의 꽃이라는 도서관 1층 홀, 혹은 로비에 있는 안내창구 옆 1차 참고봉사 업무다. 학당에 정착하고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는 모든 자료실을 돌아가며 근무했고, 들어오는 자료들도 가리지 않고 모두 확인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읽어버릇하니 급기야는 도서관의 장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이로 손꼽을 정도가 된 것이다.


참고봉사 업무는 아침, 점심나절, 저녁을 번갈아 자리를 지켜 이용자를 맞이하고 그 외에는 도서관의 자료를 살피는데 쓴다. 개인의 서재였던 곳이 이제는 학당의 도서관이 되어 그 규모가 커진 만큼 다양한 자료를 보고 확인하는 것이 업무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자료를 보고 그것을 기존의 자료와 엮어,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이용자가 오면 그가 찾는 자료와 관련 타래를 알려주는 것이 참고봉사이고 그것이 일리히의 업무였다. 물론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각각의 담당 사서가 있지만 일리히는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분야의 참고봉사를 담당한다.






린네라는 이름은 약초학자인 캐드펠이 붙였다. 식물을 무리지어, 각각의 가족으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린네이고, 그래서 약초학과의 고양이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웃었다. 린네라는 이름 뒤에는 에르브, 즉 향신채인 herb를 성으로 붙였다. 린네 에르브. 그것이 노란 고리의 녹색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장수족 특성이 뒤늦게 발현한 장년의 캐드펠 교수가 데리고 다니면서 더더욱 이름이 알려졌다. 사람을 차별하는 고양이로 유명한 것도 있었다. 캐드펠 교수에게는 먼저 다가가지만 특별히 애교를 부리지는 않으며 그럼에도 항상 붙어 다녔다. 게다가 장수족인 캐드펠 교수가 나이를 먹어가는 사이, 고양이도 몇 개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길 몇 번 반복하다보니 대를 잇고 있거나 탈피하는 것이 아닌가란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포유류다보니 탈피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의 샘에서 회춘하고 돌아오는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소문으로 살이 붙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지금 도서관 홀에서 넋을 놓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스테트?”


검은고양이가 노란눈을 반짝이며 빛이 들어오는 도서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서관은 서고도 많고 워낙 크지만 용들이 설계한 공간이라 용들의 전매특허인 공간마법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 그래서 중앙 홀은 3층 높이에서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며 그것도 유리에 걸린 마법으로 직사광선이 아니라 은은하게 퍼져 내려오도록 설계되었다. 그 덕분에 천장을 바라보면 밝은 날에도 무리 없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서 처음 방문하는 이용자들은 저 고양이처럼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다만 검은고양이다보니 고양이 모습의 신, 바스테트와 같아 보였다는 것이 독특했던 것이다.


일리히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고양이는 꿈에서 깬 것처럼 움찔하고는 돌아보았다. 노란눈인줄 알았더니 검은고양이들에게서 흔히 보는 녹색눈이다. 그것도 홍채 가장자리는 노랑을 띈 녹색 눈. 고양이는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일리히가 있는 참고봉사 데스크로 다가와 일리히 주변을 돌며 관찰했다. 학당 주변에는 개나 고양이나 다 많았고 도서관에 들어오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라 일리히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래서 고양이가 슬그머니 다리에 몸을 붙여 왔을 때는 흠칫 놀랐다. 일리히의 몸짓에 덩달아 놀란 건지 고양이는 커다란 눈을 맞춰왔다. 놀란 것이 미안한 마음에, 일리히는 슬며시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곧 고양이는 발랑 뒤집어 배를 보이고는 목 안 쪽에서 골골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리히가 쓰다듬는 손길을 즐겼다. 계속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업무는 마저 끝내야 하기에 손을 떼자, 고양이는 곧 무릎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어쩔 도리 없이 일리히는 웃음을 가벼운 한숨으로 쓸어 내리고는 도로 자료정리에 집중했다.


고양이의 정체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고양이보다는 덩치가 있지만 뚱뚱한 것은 아니고, 다만 크기가 클뿐인 고양이. 거기에 노랑으로 보이기도 하는 녹색 눈.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 몸을 붙이는 것은 소문과 달랐지만 외모만 봐서는 식물학부 약초학과의 린네 에르브 같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당 내의 여러 정보를 수집하다보니 학당 내의 동물들에 대한 정보도 대강 알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는 이런 저런 경로로 다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캐드펠 교수님의 반려동물이라 알려졌지만 사실 동거묘로 표현하는 것이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약초를 수집하고 약초밭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특이한 고양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고양이라고는 하나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 다시 말해 인격을 가진 존재로 추정된다는 것도. 이 정보는 기록관리학 교수인 기록관장 제로디안에게 들었다. 예전에 자료를 찾아주었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의 업무를 다 마무리할 때까지 고양이는 내내 일리히의 주변을 맴돌았다. 퇴근하기 위해 짐을 정리할 때가 되자 고양이는 짐 정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리히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약초밭으로 가는 건가 했지만 약초밭으로 가기 위해 갈라지는 길에서도 쫓아오는 것을 보고 일리히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 놀러오는 거야?”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좌하여 듣던 고양이는 야옹하고 답했다. 잠시 생각하던 일리히는 웃으며 흔쾌히 고양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고양이에게 줄만한 것이 없나 찬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고양이가 올라와 우유와 샐러드용으로 만들어 두었던 닭고기를 앞발로 가리켰다. 율리히가 자신의 몫으로는 연어 샐러드를 준비하면서 연어 몇 덩이도 따로 떼어 닭고기와 함께 내어 주자 고양이는 사양하지 않고 식탁에 올라와 맛있게 먹었다. 마실 것으로 우유 한 대접을 내놓자 그것도 말끔하게 비우고는 설거지할 때는 옆에 올라와 구경하고 있었다.


자기 전 자몽향 차를 한 잔 준비해 침실로 들어왔더니 따라와서는 먼저 침대에 올랐다. 일리히는 베갯머리 책을 꺼내 들고 차를 홀짝이다가 옆구리에 붙어 있는 고양이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이름은 린네 에르브지?”


눈을 지그시 감고 골골 거리던 고양이는 살짝 눈을 뜨고 눈을 맞춰 오더니 도로 감았다. 긍정의 의미 같았다. 아니었다면 뭔가 다른 의견 표시를 했을 것 같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고양이라더니 이쯤 되면 대화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그날 밤 린네는 일리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잤다.


아침에 일어난 일리히는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났다. 린네는 더 잘 모양인지 미동도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양이는 워낙 잠이 많은 동물이니 그럴 거라 생각하고 출근하면서, 살짝 창문을 열어 두었다. 방범 마법이 걸려 있어 창문 열린 정도로는 별 문제 없을 거였다. 들어가는 것만 막지 나오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온 일리히는 도서관에 가기 전 약초학과의 밭으로 찾아갔다. 예상대로 아침 일찍이지만 캐드펠은 밭에 나와 잡초를 뽑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군.”


“그보다 교수님이 도서관에 안오신다 해야겠지요. 잘 지내셨나요.”


“나야 항상 그렇지 뭐.”


장수족의 발현 증상이 늦었던 캐드펠이나, 장수족 발현이 특이하게 나타난 일리히는 일찍부터 알아온 사이였다. 도서관에 들어가면서는 주로 업무로 만나긴 했지만 알고 지낸지 오래되어 간만에 만난다 해도 거리감 같은 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간밤에 고양이가 저희 집에서 지냈습니다. 알려드리려고요.”


한창 잡초를 뽑고 있던 캐드펠은 허리를 피며 웃었다.


“오늘은 거기였나. 요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잘 오지도 않거든. 봄이라 밖에서 자도 크게 문제는 없고, 밭의 건초더미에 들어가서 자는 일도 부지기수고. 근데 어디서 만난 거지?”


아무래도 린네는 밭 주변을 돌아다니는 터라, 밭 근처에 오가는 것이 아닌 일리히와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일리히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죽 풀어 설명해주었다.


“아아. 맞다. 도서관 로비가 햇살이 잘 들어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몸 녹이러 들어간 건지도 모르지. 근데 쫓아갔다면 조금 특이하긴 한데. 본래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누군가를 따라가는 일은 드물거든. 어쩌면 한 눈에 반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캐드펠 교수님이 주인이시니…….”


“그건 아냐. 린네는 약초학과의 고양이지만 주인은 없어. 나는 그냥 가끔 챙겨주는 정도고 린네의 주인은 린네 에르브 본인이야.”


본인이라는 단어가 조금 안 맞기는 하지만 고양이 자신의 주인은 고양이라는 말은 알아 들었다. 일리히는 린네의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의 유의점을 몇 가지 더 듣고 나서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도서관이 사람 만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는 캐드펠 교수에게서 들은 바 있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일리히의 침대에 누워 있자니 어제 씻고 났을 때 났던 자몽향이 풍겨왔다. 새콤하지만 달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린네는 일리히가 나간 뒤에도 한참을 침대에서 굴러 다니다가 나왔다. 이불에 굴을 파놓고 나온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이리저리 입으로 물어 이불을 잘 정리하고 가능한 평평하게 만들고 나왔다.


식탁 위에 올라가자 어제 식사했던 자리에 생선 약간과 닭고기, 물이 있었다. 가능한 옆에 튀지 않도록 조심히 먹고 다시 자리를 정돈한 뒤 슬쩍 돌아보니 부엌 창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어젯밤 닫고 자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건 일부러 열어 놓은 모양이다. 닫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이상 어렵다. 인간이라면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건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린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와 약초밭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도 도서관 로비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검은고양이는 도서관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들어가더니 로비 한가운데, 햇빛이 내려오는 자리에 잡고 잠시 명상을 하다가 몸을 죽 뻗어 기지개를 켰다. 시계도 볼 줄 아는 건지, 오후 근무가 끝나는 여섯시가 가까워지자 느긋한 걸음걸이로 참고봉사 데스크로 다가왔다.


“고양이 키우세요?”


오늘의 참고봉사 마지막 이용자인 에디르는 윤기가 반들반들한 털을 가진 린네를 보고 눈을 빛냈다.


“키우는 건 아니고, 어제 나를 따라오더라고. 오늘도 같이 가려나봐.”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같이 퇴근하시게요?”


퇴근만 같이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살짝 돌려 물었다. 일리히는 잠시 망설이다가 린네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퇴근할까?”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린네는 일리히에게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고는 발라당 드러누워 골골댔다. 일리히는 더 못참고 자리에 주저 앉아 린네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되었네.”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에디르는 집사가 간택 받는 건 오랜만에 보았다며 활짝 웃었다.


그 다음날, 에디르는 주변의 고양이 집사들에게 이것저것 받아왔다면서 고양이 용품을 하나 가득 들고 왔다. 다른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과 같은 걸 쓰면 되지만 가끔 쓰게 된다는 고양이 전용 세정제와 고양이의 간식, 그리고 생식 만들 때의 주의점 등을 적은 작은 수첩이었다. 에딘도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것이고 새로 집사가 되는 이에게 전해주도록 들었다며 손때 묻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그거와 함께 같은 크기의 조금 더 두꺼운 빈 수첩을 내주었다.


“이 수첩 내용을 새 수첩에다가 옮겨 적으며 정리하는 겁니다. 본인이 할지 말지는 자율이지만 하는 쪽이 남는 게 많아요. 음, 자기가 겪은 일들도 같이 적어 놓으면 좋고요. 그리고 적어 놓은 걸 이 수첩 뒤에 덧붙이면 됩니다.”


에딘은 수첩 뒷부분을 펼쳤다. 앞의 절반은 한 사람의 글씨지만 그 다음의 세 장, 그 다음의 다섯 장, 그 다음의 한 장 등등 뒤는 서로 다른 글씨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의 크기와 몸무게 등의 특징을 적고 그 뒤에 앞서 적힌 곳에는 없었던 고양이 정보를 추가한 모양이었다. 그 형식은 본편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적은 세 장짜리 메모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양식 맨 앞에 있는 작성자 이름이 익숙했다.


“누군지 아시죠?”


“이 이름이 진짜 저……?”


“학당 내에서 그 이름을 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아요. 제로디안. 도서관 옆집 주인이요.”


농담처럼 에디르가 덧붙였지만 주인은 아니고 도서관 옆 기록관장이다.


“저도 수첩 받으면서 들은 건데 기록관에 쥐 대책으로 고양이를 들였을 때, 그 당시 기록관 직원 중 한 명이 기록관장에게 이 수첩을 건넸다고 그래요. 그걸 보고 고양이 키우는 자체 매뉴얼을 만들었고, 매뉴얼과 별도로 이 수첩은 기록관의 민간기록물로 지정하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추가 분량을 썼다고 해요. 들은 것이긴 하지만 글씨체가 맞다는데요. 그리고 보존마법을 걸어서 기록관 내에 보관하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빌려주고요. 대신 나중에 맨 뒤에다가 추가 내용을 적는 것이 조건입니다. 저도 그렇게 받아왔고요. 그러니까 다 옮겨 적으시면 기록관에 반납하세요.”


반납하고 나면 나중에 또 필요한 사람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대신 고양이수첩을 빌리러 간단다. 수첩 구입비용 같은 것은 학당 내의 고양이 동아리에서 부담한다던가. 그 고양이 동아리는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여러 고양이들을 포함해 특별한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들을 위탁 관리하고 있으며 이렇게 고양이 집사가 나타나면 고양이 키우는 것을 돕는다고 했다.


“나비당의 목표는 모든 고양이가 안락한 생활을! 이니까요. 고양이가 안락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고양이 주인인 집사부터가 고양이를 잘 알아야 하고요. 고양이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있고, 식생활도 알아두면 좋아요.”


그 덕에 일리히는 린네를 집에서 키우기 위한 준비를 수월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나비당에 후원금액을 내고 6개월 간 아침 출근시간에 도서관 뒤쪽의 고양이 급식소를 담당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원래 그 급식소를 맡고 있던 도서관 직원은 장기 출장으로 이웃 국가인 이안에 간지라 대신 맡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학당 내에 고양이 급식소가 있다는 것은 지나가다 봐서 알고 있었지만, 학당 내의 고양이 동아리 이름이 나비당이고, 그 동아리가 급식소 위탁 운영을 맡고 있고, 도서관 뒤에도 고양이 급식소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도서관 뒤편은 바로 숲과 연결되어 있어 고양이 외의 다른 동물들도 종종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급식소라고 하지만 물통과 고양이용 사료를 놓는 것이 전부라, 아침에 동아리 창고에 가서 사료와 물을 가지고 가서 청소하고 놓은 뒤 퇴근하면서 사료통만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되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도 좋네.”


일리히는 수첩 옮겨 쓰는 그 옆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는 린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린네가 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일리히의 일상은 몇 가지 다른 일들이 추가되었지만 별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린네가 침대에서 더 자는 사이 출근 준비를 하고, 린네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뒷정리를 하고 함께 출근한다. 출근길에 도서관 뒤 고양이 급식소에 들러 청소를 하고 물통과 사료통을 채운 뒤 도서관에 온다. 린네는 거기서 바로 텃밭으로 출근해 들쥐들을 살피고 일리히는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업무를 먼저 마친 린네가 항상 도서관에 와서 로비의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다가 함께 퇴근하는 걸로 끝냈다. 집에 돌아와서의 청소는 침구에 묻은 린네의 털을 터는 것부터 시작했다. 털을 털고, 바닥 청소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치면 남은 시간은 수첩을 옮겨 적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린네는 일리히가 읽는 책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이 들었고 취침시간이 되어 일리히가 책을 내려놓고 불을 끄면 린네는 일리히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자기 침구를 좋아하는 고양이들도 있다지만 린네는 일리히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동거 후에 마련한 바구니와 폭신한 수건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현관문에 고양이 전용 출입구가 설치되었고, 일리히가 쓰는 침구는 털이 박히지 않는 툭툭한 면제품으로 바꿨다. 창고에는 고양이 전용 사료가 한 포대 생겼으며 빗도 추가되었다. 다행히 욕실용품은 일리히가 쓰고 있던 것도 순한 것이라 린네가 쓰기에도 문제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양이지만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고양이인 덕에 린네는 장난감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일리히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는 거나 테이블에 드러눕는 모습을 보면 고양이다웠지만 낚시 장난감도 좋아하지 않고 쥐모양 인형은 거들떠도 안 봤다. 하기야 평소 업무가 쥐 사냥이었으니 실물도 아닌 인형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린네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일리히였다.


“확실히 자가가 이런 때 좋네요. 세 들어 살면 집 옮길 때는 편한데 대신 집을 마음대로 고치기가 어려우니까요.”


“복원하면 가능하잖아.”


“그게 어렵잖아요.”


고양이 급식소를 맡으면서 일리히의 교우관계는 이전보다 확연히 넓어졌다. 다른 급식소를 담당하는 봉사자들과도 인사만 주고 받다가 차츰 말을 섞고 가끔 함께 차를 마시자, 아는 사람들도 도서관 직원이나 도서관 단골 이용자들보다 더 넓어졌다. 이렇게 고양이는 일리히의 삶을 바꿨다.


“그보다, 혹시 고양이들이 사람 먹을 것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나요?”


찻잔 정리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일리히는 파이안에게 물었다. 도서관 근처의 고양이 쉼터를 오래 관리해왔던 파이안은 일리히와 린네가 동거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이번에도 좋은 답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고양이마다 다른데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는 종종 사람 먹을 것도 달라고 하거든. 개보다는 덜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성격차야. 우리집 네 마리도 한 녀석은 나 밥 먹을 때마다 빤히 보면서 달라고 하지만 다른 셋은 고기 먹을 때나 가끔 관심을 보여. 린네가 그래?”


파이안의 대답에 일리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먹는 모든 먹을 것에 얼굴을 들이밀고 검수하더니 최근에는 먹으려고 하더라고요.”


“다?”


“다는 아니고 짠 음식은 냄새만 맡고 마는데 아침 식단은 관심이 많아요. 오늘 아침에도 오믈렛이랑 구운 채소 먹는데 오믈렛을 먹으려 들길래 밀어냈거든요. 어제의 요거트도 관심이 많았고, 그 전에는 코티지 치즈도 그렇고. 아. 저녁 먹을 때 맑은 국물이면 높은 확률로 달라붙어요.”


“특이하네. 뭐, 채식하는 고양이도 있으니 아주 특이한 건 아니지만 일단 네 음식에 관심을 보이는 건 좋아서 그런가 본데?”


파이안이 놀리자 일리히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업무처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린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매번 듣는 소리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보여준다는 것은 가슴 한 구석이 몽글몽글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라 그런가 싶었다.


그 뒤에도 꾸준히 관찰하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린네는 짜거나 매운 음식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매운 음식을 먹으려 할 때는 멀찍이 떨어졌고 짠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음식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먹을 때마다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는 모양이 그랬다. 대신 짠 음식이 나올 일이 드문 아침 식사는 꼭 참견했다.


“가장 많이 참견한 건 유제품이예요.”


“치즈?”


“크림치즈도 그렇지만 우유가 들어간 건 다요.”


오늘은 오후 느지막이 도서관 회의실에서 고양이 집사 모임을 가졌다. 원래는 업무 협조를 구하기 위한 회의였지만 예상보다 회의가 빨리 끝나자 그 뒤에는 고양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직원들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울 예정이라 서로 자연스레 흘러간 덕이었다. 그래서 일리히는 수첩을 꺼내들고 꾸준히 적어두었던 린네의 음식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같이 우유가 들어가도, 카레는 좋아하지 않는데 크림스튜나 크림수프, 하여간 크림소스가 들어간 음식은 다 관심이 있더라고요.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어하는 것은 크림치즈류고요. 지난번에 티라미수를 만들려고 마스카포네 크림을 꺼냈더니 내놓으라고 난리치더라고요. 주면 안된다고 해서 밀어냈더니 어제 아침에는 토라져서 나갈 때도 얼굴 안 보여줬어요.”


일리히는 말하면서 웃었지만 속은 쓰렸다. 항상 쫓아오던 시선이 어느 순간 돌아서서 외면하는 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처음 만난 날은 우유를 주었지만, 수첩에는 우유는 소화를 못해 문제가 생기기 쉬우니 주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고, 그래서 아예 안 주려 했지만 가끔 유제품이 식탁에 오르면 참견하는 린네를 보며 미안한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안 될 음식에 끼어들 때는.”


일리히의 시무룩한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비키스트, 통칭 비키가 입을 열더니 살짝 뜸을 들였다.


“그럴 때는요?”


“인간이 되면 줄게.”


눈앞에 자신의 고양이 미미가 있는 것처럼, 비키는 훈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순간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과연. 고양이가 인간이 된다면 인간의 신체를 가지는 셈이니 특별한 문제없이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였다.


“근데 실제로도 케이스가 없지는 않아. 고양이가 인간이 된 경우. 장수족도 그렇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별로 티가 안나잖아. 고양이들 중에도 종종 인간으로 변신이 가능한 애들이 있다던걸. 도서관 고양이 중에서도 가끔 이야기 나왔고 학당 내에서도 몇 보고가 있긴 했어. 많지는 않지만.”


진제르는 장수족이며 도서관 고참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도서관 내 이용자 교육을 전담해왔던 터라 그런 이야기에 빠삭했다. 학당은 일반화하기 어려운 여러 특이사례들이 많이 모였고 관련 기록과 자료를 모으기 위해 도서관과 기록관이 협력하는 터라 쌓인 자료 규모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장수족이 많은 도서관 사서들은 각자 후임을 한 명씩 끼고 둘이 한 조로 활동하며, 그렇게 도서관의 지식과 정보를 전수해갔다. 그 자산들은 모두 이용자들에게 원활히 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르네는 그 크기부터가 특이한 걸요. 보통 고양이의 1.5배쯤 되는데 또 다른 고양잇과 동물은 아니고요. 분명 고양이는 고양이인데.”


“그래서 무거워요.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제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자다보니 들어 옮기려는데 무게가 상당해서 결국 포기하고 같이 잤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요즘에는 그냥 같이 자요.”


“아, 맞아. 고양이들이 꼭 침대 시트 좋은 건 알아가지고 말이지. 문제는 그 털인데…….”


“털이 문제죠.”


모여 있던 이들은 다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마법이 있다 한들 털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해도 털 몇 올 쯤은 옷에 붙여 있고 어딘가에 굴러다니기 마련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건 결벽증이 있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고, 결국에는 고양이를 보내거나, 결벽증을 보내거나 양자 택일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깔끔떨며 청소하면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어요. 눈 감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결벽증으로 유명했지만 고양이 케리스를 들인 뒤 완벽한 청소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던 릴리스트는 웃음으로 정리하며 모임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약간 열이 오른다 싶은 낌새에 일리히는 후임에게 업무를 넘기고 조금 이른 퇴근을 서둘렀다. 몸 상태를 보니 오랜만에 불청객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서두른다고 해도 저녁거리 장까지 보고 나니 생각보다는 늦어져 아슬아슬하게 현관에 도착했을 때, 문을 닫고 나니 몸은 이미 줄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 내내 집에서 굴러다니다 마중 나온 르네의 눈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때보다 크고 동그랬다.


“아하하. 놀랐어?”


놀라다마다. 르네는 눈이 커진 것은 둘째치고 몸이 굳어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리히는 일단 신발을 벗고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을 하나씩 벗어 내렸다. 그리고 옷들과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한데 모아 끌어안고는 침실로 향했다. 그 때쯤에는 정신이 돌아온 르네도 안절부절 못하며 일리히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리고는 바른 자세로 일리히 옆에 앉아, 일리히가 옷 갈아입는 것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리히는 르네가 온 뒤로는 한 번도 연 적이 없었던, 그래서 르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입던 옷과는 확연히 크기가 다른 옷들이 걸려 있었다.


“이럴 때 꺼내 입는 옷이야. 1년에 몇 번 정도 이러는데 딱 언제다 싶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렇게 몸이 줄어들 때는 감기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해. 감기랑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눈치채거든. 오늘은 그래도 퇴근시간에 맞춰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도서관에 따로 둔 옷으로 갈아입고 퇴근했어야 하니까.”


일리히의 목소리 톤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아직 변성기가 오기 전인지 목소리의 톤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어린 모습의 일리히는 재잘거리는 것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이만 어려졌고 그나마도 아주 어려진 것이 아니라 2차 성징이 오기 전의 모습인데 그런 귀여운 반응이라 나름 즐기고 있었다.


“왜, 린네?”


아까보다는 진정했는지 동공크기는 아주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한 린네는 그 뒤로도 일리히의 발치에서 졸졸 쫓아 다녔다. 심지어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샤워하는 동안 욕실 앞 매트 위에 올라 앉아 야옹거리며 일리히를 기다리는 짓도 했다. 반응이 다르니 재미있기도 하고 많이 놀랐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저기 보이는 것은 보통 고양이가 아니다. 그러니 평소보다 닭고기 햄을 하나 더 건네는 일은 하면 안된다며 일리히는 애써 린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저녁식사 후 자리를 정리한 뒤 평소처럼 침대에 책을 들고 올라가자 린네도 냉큼 따라 올라왔다. 최근에는 발치에 자리를 잡더니 일리히의 몸집이 작아진 오늘은 바로 옆에서 잘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몸 위에 올라타 자려다가 숨이 막힌 일리히가 밀어내자 토라져서 발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은 일리히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그대로 잠이 들었다. 원래도 일찍 잤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빨랐다. 그 뜨끈뜨끈한 열기가, 생명력이 다가오는 느낌이 참 묘해서 일리히도 평소보다 일찍 책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작아지면 일리히의 업무도 바뀐다. 작은 몸으로도 참고봉사를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후임인 에이게르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한 달 쯤 옆에서 업무를 들여다 보았던 데다 오늘 전달할 사항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요일 패턴을 확인했을 때 오늘은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하루쯤은 맡겨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도서관으로 종종 걸음 쳤다. 아침부터 덩달아 일리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 린네는 그대로 따라서 출근했으며, 덩달아 도서관 로비 한 쪽, 참고정보 전용 데스크에서 일리히가 에이게르에게 아침 업무 사항을 전달하는 사이 천창으로 내려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꼬리는 시계추처럼 따로 움직였다.


“오늘은 특별히 어려운 수업이 없으니까 정보 요청도 대개는 대응할 수 있을 거예요. 급한 일이 있으면 보내세요.”


도서관의 직원용 식별 카드는 목걸이처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팔에 감아 두기도 하는 등 직원마다 다양하게 이용했지만 대개는 목에 걸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에이게르나 일리히도 도서관 이용자가 알아보기 쉽도록 목에 걸고 있었다. 일리히는 예비용으로 하나 두고 있던 작은 식별카드를 린네의 목에 걸어 주었다. 달랑 거리는 통에 린네가 몇 번 고개를 흔들어보더니 곧 익숙해진 듯,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게르는 잠시 미소를 띄웠다.


“함께 들어가시게요?”


“응. 신간 체크는 매번 하더라도 서가 둘러보는 걸 하지 않으면 또 정보 조합이 안되니까요.”


일리히는 아래쪽 서고에 있을 것이니 급한 일이 있으면 호출하라고 하고는 린네와 같이 종종걸음 치며 서고로 들어갔다.






학당의 도서관은 일반 열람실과 서고로 나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고의 규모가 훨씬 크며, 일반 열람실에서 5년 평균 이용률이 1회도 안 되는 도서는 서고로 옮긴다. 서고에서도 이용자가 찾는 책은 도로 열람실로 올라오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서고의 출입은 허가를 받은 일부 이용자를 제외하고는 사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서고로 들어오니 조용하다. 린네는 도서관 로비에서부터 일리히의 뒤를 따라왔지만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륜.”


마침 회의에서 나온 륜이 눈앞을 지나가길래 일리히는 륜을 불러 세웠다. 그제야 일리히에게 붙은 비인식마법 흔적을 발견한 륜은 마주 웃었다.


“이런. 꼬마구나.”


“린네도 같이 있어요.”


린네는 륜이 쉽지 않은지 슬쩍 몸을 빼고 일리히의 뒤에 숨어 있다가 들키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용이 된 이후에는 종종 그런 반응을 받았던 터라 륜은 익숙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시간 나는 김에 차 한 잔 하고 가지?”


일리히가 륜을 붙잡은 목적은 도서관 근무 장소의 일시 변경이었고, 륜은 일리히가 원하는 대로 잠시간 위층 참고봉사 담당자인 엘러퀴안을 참고봉사 주담당자로 임시 배치했다. 에이게르는 아직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일리히의 아래에서 몇 년 일을 배우고 단독 참고봉사를 시작한지 3년째인 엘러퀴안이 보조한다면 충분히 도서관 로비의 참고봉사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일리히가 언제쯤 다시 성인의 몸으로 돌아올지 모르니 임시 배치가 상당히 길어질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일주일간 상황을 보고는 그 뒤에 업무를 바꿀지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아니면 잠시 쉬어도 되지 않나. 유급휴가가 꽤 쌓였을 건데?”


“일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요. 도서관에 와도 일하러 오는 쪽이 즐거워요. 그래야 쉴 때 도서관에 오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잠시 쉬라고 넌지시 건네는 말에 일리히는 살풋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이런 때가 아니면 린네랑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테고요.”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덕에 고양이는 닭고기 육포 한 덩이를, 꼬마는 차 한 잔과 큼직한 쿠키 한 조각을 얻어 먹고 흐뭇한 마음으로 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고는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라 여름에도 항상 서늘한 온도를 유지했다. 적정한 온도와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는 것은 책 보관의 기본이며, 조명도 마찬가지로 열람실보다 낮은 조도를 유지했다. 일리히는 서고 안에서 만난 다른 이용자들과 한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서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사이 린네는 서가 꼭대기 맨 윗부분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 참아가며 뒤를 쫓았다. 한 자리에서 오래 있는 것 같으면 그 근처 책장의 빈 공간을 찾아 몸을 말아 넣고 고양이 잠을 청했다. 한잠 자다 나오면 일리히는 서가를 따라 빙글뱅글 지그재고 움직여 저 멀리 가 있다. 린네가 일어나 발 딛는 소리를 들은 건지, 일어날 때면 살짝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서가 밖 통로로 얼굴을 내밀어 린네가 따라 올 수 있게 했다. 린네가 기지개를 쭉 켜고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면 일리히는 웃으며 맞아주었다. 린네도 신이 나서 일리히의 다리에 몸을 비비다가 눈높이의 책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냄새 맡기도 했다. 희한하게 여기저기에 다른 동물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 가끔 서고에도 고양이나 개들이 들어와. 쥐나 다른 동물들이 들어와 있는지 확인하고 가끔은 벌레로 훼손된 책을 찾기도 하고.”


물론 마법을 쓰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살충 마법은 해충과 익충을 가리지 않고 일괄적으로 죽이는데다가 자칫 책에 걸린 검색 마법 시스템, 세비아누와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어 아직은 쓰지 않았다. 사용할 때는 심각하게 벌레 먹은 책들만 골라서 살충마법을 돌리고, 다시 검색 술식을 걸고 나서야 서고로 돌아왔다. 책을 관리하는 마법들은 보수적인 성격의 사서들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검증을 거친 뒤에야 도서관에 들어왔다. 예외적인 것은 검색 마법 시스템인 세비아누였다. 걸려 있는 마법 자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간결하여 기존의 다른 마법들과 충돌하지 않으며, 처음에 도입할 당시에는 수많은 책들에 마법을 하나 하나 걸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한 번 도입한 뒤에는 유지 보수가 간결했다. 그 때문에 최초 제안자인 세비아누 이리스의 이름을 따서 시스템 자체가 세비아누라 불렸다.


“시스템이 발표되었을 때 륜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냐며 투덜댔지만. 그 다음에 투덜 댔던 건 책들에 마법을 거는 과정이었어. 도입은 빨리 했지만 책이 워낙 많으니까 작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거든. 그래도 새 책부터 마법을 걸어서 차근차근 확대하니까 다 끝나긴 하더라.”


평소라면 조용히 있었을 건데 들어주는 고양이가 있으니 일리히는 작지만 또랑또랑한 말소리로 재잘댔다. 서고에 들어온 것도 좋았지만 린네와 같이 들어와 누군가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좋았다. 그래서 살짝 들떠 있는 김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맴돌았다.


일리히가 하고 있는 작업은 보통 서가 탐색이라 부른다. 하지만 일리히는 서가 하나가 아니라 서고 전체를 훑고 있으니 서가 탐색보다는 서고 탐색으로 보는 것이 옳다. 특정 도서를 목적으로 하는 검색과는 달리, 탐색은 서가, 서고 내에 꽂힌 책들을 훑는 작업이다. 도서관의 책들은 들어올 때 책이 가진 주제에 따라 분류기호를 받고, 그 분류기호와 저자기호를 조합한 청구기호에 따라 서가에 꽂힌다. 청구기호는 모든 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분류기호 안에서는 저자에 따라 책이 꽂힌다. 일리히의 서고 브라우징은 서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관심 있는 책은 목차를 확인해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꽂아 넣어 가면서 주제구조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책에 더해 새로 들어온 책을 매번 확인하면서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자료를 업데이트 하기도 하지만, 가끔 시간을 내어 이렇게 서가를 둘러보면서는 학자들의 요청, 수서 담당 사서의 업무, 분류 담당 사서의 주제 부여에 따른 도서관 각 주제분야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들어온 책을 확인할 때는 일리히의 주제별 분류에 대한 견해가 가장 영향을 주지만 도서관 내 서가에 배열하는 것은 분류 담당 사서들의 업무이므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종종 전문 학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제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 그런 정보도 꾸준히 갱신했다.


“궁금한 책이 있으면 말해. 꺼내줄게.”


복잡하게 말할 필요 없이, 이용자들이 요구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가끔씩 그 정보들을 꺼내다가 재구조화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참고봉사를 쉴 때면 직접 서가에 올라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책들을 확인하고 머릿속에 든 서가 정보를 갱신하는 것이 일리히의 일이다. 물론 업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그냥 노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고, 업무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서가 여기저기를 훑는 것이 업무 예비 작업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나마 일리히와 오래 일해 온 사서들이나, 자주 찾아오는 이용자들은 알아준다.


‘뭐라 해도 도서관은 단골 장사야.’


학당에서 도서관은 그 자체로도 존재 의미를 가지지만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이용하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더 자주 이용할 것이란 점은 자명했고, 이용하지 않는 이들은 앞으로도 이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어떤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교수들과 사서들이었다. 학당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건 진지하게 서가를 바라보는 저 고양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서가 탐색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차피 언제 몸이 돌아올지 모르니 일리히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린네도 적응한 모양이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서 주제분야 업데이트 하는 것도 나름 좋았다. 에이게르에게는 업무 시간 시작하자마자 찾아가서 그 전날의 업무가 어땠는지 듣고, 질문을 받아 답변하며 가르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가닥이 있어 어렵지 않게 업무를 이어나갔지만 그래도 일리히만큼 방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보니 일리히와 연이 있던 학자들은 직접 일리히에게 답을 듣길 원했다. 그런 상담은 참고정보 공간 안쪽으로 있는 상담실에서 시간을 잡아 진행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다보니 린네는 일리히의 모든 활동에 함께했다. 처음에는 낯설어 했던 학자들도 며칠 지나니 슬슬 익숙해진 모양이라 고양이가 있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다. 일리히가 가능하면 털이 날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철저하게 관리한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일주일 째.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난 일리히는 당황했다. 발치에 있어야 할 검은 고양이는 어디로 가고,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몸집이나 체형은 린네와 닮았지만 털색은 확연히 달랐다. 그나마 눈을 떴을 때, 린네의 눈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다른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는 거야?”


일리히가 턱을 간질이며 묻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린네는 기지개를 죽 켜고 거울 앞에 다가갔다가 일주일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석상이 되었다. 그 모습에 일리히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린네는 토라졌고, 아침밥을 챙겨 이름을 부를 때까지도 내내 뾰로통한 모습을 보였다.


낯선 모습이라 그런지 그날은 고양이 쉼터에 가는 동안 따라오지 않았다. 저녁 때 도서관으로 마중 나왔을 때는 평소와 다른 없는 검은 털이어서 안심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발견한 건 샴이었다. 특유의 털 색 때문에 몰라볼리 없었는데, 깨워 확인했을 때 눈만큼은 샴 고유의 하늘색이 아니라 린네의 녹색 섞인 노랑 눈이었다. 그 눈 덕에 더 특이해 보였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졌다. 항상 같이 다니다보니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던 에이게르도 그러려니 하던 통에 이상함을 못 느꼈고, 그나마도 이번에는 열흘만에 원래 나이대로 돌아온 덕에 제대로 휴가를 누리지도 못해 정신이 없었던 터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하여 그 며칠 뒤, 샴의 모습으로 변신한 린네가 고양이쉼터 회의 자리에 동석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모양에 그제야 특이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기야 본인도 나이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 판에 고양이가 종을 바꾼 것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겠지.”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어느 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일리히는 슬며시 웃으며 찻잔을 린네에게 가져다 댔다. 적당히 식은 것을 확인한 린네는 홀짝 거리며 민트티를 받아 마셨다.


원래의 모습 외에도 다양한 고양이로 변신하는 건 가능했지만 여전히 고양이는 고양이였기 때문에 아침의 유제품 관련 전투는 계속되었다. 하드치즈는 염분이 강해서 짠 냄새 때문인지 신경 안 쓰지만 소금이 거의 안 들어간 코티지치즈와 마스카포네 치즈에는 관심가지는 걸 넘어서 열광하던 떠올리면 입이 상당히 까다로운 고양이였다.


그런 연유에서 그 다음 두 주 정도는 아침 밥상머리에서 우유를 빤히 바라보는 린네의 시선을 견디다가, 그 다음 주부터는 우유를 밥상에서 제외했다. 어차피 점심 도시락으로 우유를 마시면 문제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침상을 차릴 때마다 린네의 우울한 눈매를 마주해야 했다. 결국 한 달쯤 버티다가 두 손 들고 린네 몫의 우유를 따라주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린네가 두 손 두 발을 들 차례였다. 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곧 유당분해효소가 없음을 배탈로 증명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먹기 이전으로 돌아가 그림의 떡을 보는 듯한 그윽한 눈길로 우유를 마주했다. 덕분에 일리히는 ‘인간이 되면 괜찮게 먹을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유제품은 시험해보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아침, 품안에 고양이귀를 달고 있는 꼬마가 안겨 있었을 때도 일리히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의 추정 연령대는 12세 정도. 일리히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정도였다. 흔들어 깨우자 줄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손으로 비비다가, 손을 확인하다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다가 긴 다리에 이불이 걸려 하마터면 그대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기다시피 가다가, 일리히의 도움으로 거울을 마주했다. 나란히 서보니 키는 일리히의 가슴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였다.


“린네, 소원 성취 하겠네.”


다리가 풀리는 린네의 허리를 잡아채 거울 앞에 앉혀주고 일리히는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침대를 짚고 다리를 움직이려 노력하는 린네가 보였다. 아무래도 네 다리로 걷다가 두 다리로만 중심잡고 걸으려 하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 번 휘청이더니 곧 균형을 잡고 안정적으로 걸었다. 두 다리로도 문제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자 기쁜 얼굴로 창문을 열고 이불 정리를 했다. 그리고 방을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가 옷장문을 열었다. 그제야 알몸이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옷은 내가 작을 때 입는 옷 아무거나 골라도 돼.”


씻고 나온 일리히는 옷장 안쪽에 넣어두었던 새 속옷을 꺼내 주었다. 털이 있어 옷 입을 일이 전혀 없다가 매끈한 피부에 천을 걸치다보니 이모저모 낯선 모양이었다. 속옷을 입고는 불편한 듯 이리저리 몸을 틀다가 그럭저럭 적응되자 그 다음에는 통이 넓은 반바지와 넉넉한 크기의 긴팔티를 입었다.


출근하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고양이 귀의 인간모습을 한 린네가 옷을 다 챙겨 입은 걸 확인하고는 식탁으로 불렀다. 이전에는 그냥 식탁 위에 올라갔지만 이제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 넓은 탁자라 다행이고 의자가 여러 개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일리히는 의자를 빼고는 불렀다. 그리고 잽싸게 달려온 린네를 앉히고 그 앞에 훈제 생선포를 넣은 죽과 우유 한 잔을 놓렸다.


“오늘은 어떨지 모르니 우유 마셔보자.”


우유를 보는 린네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린네가 인간으로 변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다양한 고양이로 변신하는 린네가 언젠가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수인형도 여럿 있으니 처음에는 고양이었다지만 인간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우유 마시는 걸 보면 정말로, 인간이 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까.’


소중히 두 손으로 우유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흐뭇한 마음에 절로 입가가 풀렸다.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다가 하마터면 아침 식사를 놓칠 뻔한 일리히는 시계를 확인하고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었다. 물론 죽을 떠오기 전에 린네에게 우유 한 잔을 더 따라주는 건 잊지 않았다.


인간으로 변한 린네는 죽도 잘 먹었다. 아마도 말린 생선으로 국물을 우려 끓인 죽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변했으니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니 관찰할 요량으로 수첩에다 먹은 것들을 기록해두었다. 맛있게 아침 식사를 잘 먹은 린네는 나가기 전 잠시 머뭇거리더니 도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일 때 우유 먹은 걸 고양이 모습으로 소화시키는 건데 괜찮을까?”


짧은 침묵이 흐르고 뒤이어 린네가 대답했다.


“애옹.”


단호한 대답이어서 일리히는 웃고 넘어갔다.






그날 오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일리히는 바쁘게 움직였다. 미리 주문했던 침대 매트리스 추가분이 도착한 참이라, 린네의 도움을 받아 침실의 침구를 다 꺼내고 거기에 새 매트리스를 연결했다. 매트리스는 수지(樹脂)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라 확장이 자유로웠다. 새로 매트리스를 주문한 뒤 원래 매트리스의 옆에 수지와 아교를 섞어 만든 풀을 바르고 매트리스를 붙이면 끝이었다. 매트리스 받침대도 확장한 만큼 추가하여 이리저리 옮겨 정리했다. 둘이 작업하니 대략 한 시간 만에 침실 정리가 끝났다.


“침실에 탁자만 하나 놓길 잘했어. 덕분에 매트리스 더 놓을 자리가 있었네.”


“응.”


옷장에 있던 여러 이불 중 마음에 드는 초록 이불을 집어든 린네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일리히는 오늘 점심, 알렉세르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온 우유젤리와 동그랗게 자른 과일, 나타드코코를 섞어 우유를 부은 화채를 대접했다.


그 후로도 며칠간은 날마다 장보기가 반복되었다. 일리히의 옷이 있었지만 더 필요하다며 린네의 옷과 신발을 추가 구입하고, 컵이나 그릇, 집에서 쓰는 일상 용품들도 식구가 늘었으니 덩달아 늘어났다. 그리고 곧 인간형 린네에 대한 소문도 학당 내에 상당히 퍼졌다. 나비당 사람들은 모임이 있었던 그 날 오후에 바로 들었다.


“캐드펠 교수님이 제일 먼저 아셨지요. 그 날 점심 때 먼저 가서 말씀드렸거든요. 린네가 고양이 모습으로 출근했으니 거기까지는 모르실 것 같아서. 근데 점심 때 가자마자 인간으로 변해서는 우유를 조르고 있더라고요.”


그 당황한 캐드펠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라 일리히는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여기?”


“네.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렇네요. 하기야 린네 에르브의 인사관리카드에 인간형을 추가했으니 그 정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알았을거예요.”


그 열람 권한은 더 윗선이니 일반직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우유 좋아한다더니 진짜 열렬히 사랑했나 보다.”


웃음기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우유를 사랑하다 못해 고양이가 인간으로 변했다니, 이거 기록으로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음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일리히는 입가에 여전히 웃음을 매달고는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건데, 신맛이 돌지 않는 우유 간식이 뭐가 있을까요. 우유 외에 우유 디저트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거든요.”


“크림소스 계열은 다 가능하지 않아?”


“뭐, 그거야 당연하고요. 살짝 매콤하게 만든 크림소스도 곧잘 먹네요. 아주 매운 것은 무리지만. 산미도 아주 시큼한 발효 요거트는 안 먹고, 치즈도 짜거나 신맛이 강하면 손 안댑니다. 코티지치즈는 우유맛이 강하니 괜찮지만 크림치즈 중에서도 신맛 강한 것은 안먹어요.”


“까다롭네. 그러고 보니 마스카포네 치즈는 먹는다고 했지?”


“퍼먹지요.”


일리히의 한숨과 다른 사람의 웃음이 뒤섞였다.


“빙수는 어때요? 우유를 샤베트 얼리듯이 얼려서, 소르베 정도 되었을 때, 단팥을 섞는 거예요. 연유를 더 넣으면 우유맛도 강해지고 단맛도 더하고.”


“둘쎄데레체도 공방에서 팔걸요. 지난번에 우유잼이라며 나온 것 같던데. 그 왜, 원유를 오래 가열해 진득하게 만든 캐러멜 말이죠.”


“우유푸딩도 있잖아.”


“그건 이미 먹었어요. 마음에 들었는지 최근 며칠간은 자기 전에 꼬박꼬박 우유푸딩을 만들었고요. 이제 슬슬 레파토리를 바꿔야 할 거라 뭐가 좋을지 고민중이고요.”


일리히는 레시피를 적을 수첩을 아예 꺼내 들고는 체크하고 있었다. 수첩 하단에는 최근에 마지막으로 언제 먹었는지 연필로 적어두었다. 그래야 다양한 레시피를 돌려 먹일 수 있으니까.


“쌀푸딩도 우유맛이 강할거야. 거기에 건포도든 견과류든 섞어 줘도 좋을 거고. 아차, 초콜릿은 아직인가? 최근에 카카오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메타 차원의 창조주는 이곳을 특정 세계의 자료수집 공간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도 그 세계의 문화를 닮았다. 커피와 차문화는 초기부터 도입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초콜릿만큼은 도입이 늦었다. 그간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콜릿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하던 소륜학당의 사람들은 최근에 야생 카카오나무를 발견하여 개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초콜릿 공방이 생기는 걸 고대하고 있었다.


“조만간 공방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재배지에서 학당에 우선적으로 공급하겠답니다. 캐드펠 교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개량 작업에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열심히 받아 적던 일리히는 잠시 펜을 멈추고 대답했다.


“초콜릿은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 초콜릿은 개나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성분이 있다는 내용을 어디서 봤는데.”


공방이 들어온다는 말에 들떠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간 얌전히 차만 홀짝이던 제로디안이 입을 열자 조용해졌다. 무엇보다 초콜릿은 처음 들어오는 디저트다보니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터였다.


“지금 린네에게 우유는 괜찮다지만 초콜릿은 어떨지 모르니까 경과 봐가며 조금 뒤에 먹여봐. 그리고 다른 집들도 초콜릿 먹는 것은 절대 주의할 것. 고양이들이 초콜릿 먹으면 매우 위험하니까 말야.”


다들 퇴근 후는 포기하고, 일과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초콜릿을 시도하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초콜릿도 괜찮은 게 확인되면 초코 우유로도 시도해보고. 그, 초콜릿보다 우유비중이 훨씬 높은 걸로. 그리고 딸기 우유는?”


초콜릿이야 그렇다 쳐도 딸기우유는 아직 줘보지 않았다. 우유가 메인이다보니 우유맛을 살리는 쪽에 집중해서, 바나나 우유나 초코 우유, 딸기 우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섞은 우유는 흰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딸기 우유는 신맛이 돌지만 이정도면 허용범위 안일 듯했다. 무엇보다 화채에 들어간 딸기도 잘 먹었으니까.


그렇게 받아 적은 우유 관련 디저트는 상당히 많았다. 달걀도 다양하게 조리가 가능하지만 우유로도 이렇게 많은 음식이 가능한가 싶었다. 가장 먼저 메뉴로 오른 것은 우유 찐빵과 타락죽이라, 이 둘을 먼저 시도하기로 했다. 타락죽을 괜찮게 먹으면 그 다음은 쌀푸딩이다.





린네 덕분에 소륜학당의 우유 소재 디저트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심지어는 달걀노른자는 빼고, 흰자만 사용한 시트에, 농축 연유를 더해 우유 맛이 아주 진하게 도는 크림을 넣어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도 등장했다. 린네를 위해 고안했다던 엔젤우유케이크는 당사자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일 맛있는 건 역시 우유 그 자체야.”


단호하게 말하는 린네를 보며 일리히는 그저 웃었다. 우유 공방에 들어오는 다양한 종류의 우유를 하나씩 다 맛보며, 린네는 고양이가 아니라 매우 행복하다는 얼굴을 했다. 일 할 때야 고양이지만, 사람으로 돌아오면 우유를 양껏 마실 수 있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젖소 종에 따른 우유 지방분과 영양분 분석 논문이 있어 출력해 보여줬더니 진지한 얼굴로 탐독하고는 하나씩 맛볼 수 있냐고 물은 참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종은 우유 제품이 따로 나온 것이 있어 구할 수 있었다.


“이것도 수요를 따르기 때문에, 안 팔리면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주문하면 다른 종류도 구할 수는 있다니 다행이다.”


아무래도 학당이 워낙 큰 고객이라 그런가, 개별 주문하면 맛볼 수 있을 만큼은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농장에 주문하면 바로는 아니더라도 구입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거기에, 각각의 우유도 그렇고, 각각의 우유푸딩도 만들어 본데다, 농장별로 달리 나오는 우유로 만드는 가열농축우유캐러멜도 하나씩 정복 중이었다. 둘쎄데레체, 우유과자라는 이름의 캐러멜은 대량의 우유를 오래 끓이거나, 고온고압의 솥에 넣고 가열하여 만드는 유당 캐러멜이었다. 그래도 단 것은 적당히 먹는 편이라, 큰 병이 아니라 작은 병으로 하나씩 사다 놓고 아침마다 서로 다른 둘쎄데레체를 빵집에서 갓 나온 우유식빵이나 브리오슈 등에 뿌려 먹으며 비교하는 노트를 채우는 것도 일이다. 캐드펠 교수의 연구 방식을 본 지 여러 해라,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지만 연구실고양이 몇 년에 간단한 관찰노트 작성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건 린네가 이상한 거야.”


나비당 동료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일리히 본인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덩치도 원래부터 그랬지만 어디에든 저런 고양이는 없다. 특이한 것이 잔뜩 모인 학당에도 린네는 고유한 존재에 가깝다. 굳이 따지면 수인이지만 고양이 수인 중에서도 우유에 홀려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경우는 매우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태생적 수인이었을 테니까. 하기야 학당은 온갖 희한하고 이상한 것들이 모이는 것이니, 린네처럼 특별한 존재가 생긴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걱정되는 것은 원래 고양이인 린네가, 아무리 특이종이라고는 하지만 고양이의 수명을 따를 경우 일찍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다른 나비당 동료들은 앞서 나간 고민이라며 마구 웃었다.


“거꾸로 말야, 일리히.”


어느 날의 나비당 모임 때 진제르가 말했다.


“린네는 네가 다른 인간들처럼 일찍 죽을까 걱정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네가 장수족이란 걸 밝힌 적은 없지 않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날, 일리히는 저녁 후 우유타임 때, 린네를 붙들어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은 장수족이니 매우 오래 산다고. 린네는 일리히가 뜬금없이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야기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일리히는 유리병의 우유 뚜껑을 경쾌하게 열었다. ‘뻥!’





린네가 집에 적응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일리히가 동거묘 혹은 동거인에 적응하는 속도도 빨랐다. 혼자 살던 기간이 매우 길었지만 누군가 들어오니 그것도 나름 좋았고, 무엇보다 린네는 원래 고양이라,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유 음식 먹는 것이고 그 외에는 의자나 쿠션, 이부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골골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양이 중에는 스파이더캣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집안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고, 실제 나비당의 터줏대감인 파블로바, 통칭 파비는 하도 활발하게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둘째인 스핑크스를 들이고서야 집사일이 줄었다고 했다. 둘째 이름이 스핑크스가 된 까닭은 짐작할 수 있듯이 첫째 이름을 날아다니는 인물로 했다가 후회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제로디안이 어느 날 일리히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서야 문득 깨달은 것도 있었다.


“혼자 살다가 동거인이 생기니 불편하지는 않아?”


기록관리학 특강을 맡아서 도서관사 자료를 정리하러 왔다던 제로디안이 던진 질문에 일리히는 곰곰이 생각하며 답했다.


“별로 불편하진 않아요. 아니, 불편하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는걸요.”


“그래도 몇 십 년을 혼자 살았는데 낯설지 않아?”


“……그러네요. 낯설 법도 한데.”


일리히는 겨울이라 밭일 안 가고, 햇빛 잘 드는 도서관 홀 한 가운데서 도서관 직원들이 마련한 방석을 깔고 누워 자는 린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잘 맞나봅니다.”


“하기야.”


제로디안도 몇 대를 이어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록관 고양이로 키울 뿐이고 자신의 집에 들이지는 않았다. 나비당의 집사들 중에도 쉼터만 돌볼 뿐, 개인적인 집사를 맡지 않은 이들이 여럿 있었다. 고양이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나중에 잃었을 때가 걱정된다는 사서걱정파와,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나도영역파가 대부분이었다. 제로디안은 그 중 후자라 고양이를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제로디안의 말이 걸렸던 건지 일리히는 그날, 퇴근길부터 시작해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린네를 신경 쓰고 돌아보았다. 린네도 그 시선은 눈치 챈 듯 했지만, 린네는 평소대로 같이 돌아왔고, 씻고 나와서는 따끈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마셨으며, 저녁으로는 고소한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듬뿍 넣어 일리히와 함께 먹었다.


“린네.”


“응?”


평소처럼 거실에 깔린 러그에 앉아 책을 보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린네를 바라보길 여러 번, 일리히는 드디어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까지는 내내 혼자 살았잖아. 그냥 밖에서 돌아다니고, 마음 편하게 아무 데서나 자고. 가끔 내킬 때는 캐드펠 수사님의 오두막에 들어가고.”


“응?”


“나랑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아?”


린네는 읽던 셰익스피어 식물 화집에서 고개를 들고 일리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파악하고 싶었나, 린네는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응.”


아주 간단히 답해버린 린네는 기지개를 쭉 켬과 동시에 고양이로 변해 슬그머니 일리히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붙였다. 그리고 회색 러그에 검은 털을 뿜어내며 일리히의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골골 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응, 그래.”


더 많은 것을 물을까도 생각했지만 서로가 불편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나중에 불편을 느끼면 서로 말하고 서로 조율하면 되는 것이고, 이제부터 차츰 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고양이 린네도, 인간인 린네도 동거인으로는 참 좋았다. 고양이 린네는 위로가 필요할 때 살짝 다가와 몸을 붙여왔고, 인간인 린네는 고양이보다는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이며 우유 간식 찾는 일 같이 재미있는 삶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앞으로는 어떨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에 만족했다.








린네 에르브는 오늘도 우유를 먹고 마신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홍차를 조금 넣은 데운 우유와, 분유를 넣어 우유맛이 더 담뿍 감도는 우유식빵을 구워서, 갓 짠 우유를 지방분 걷어내지 않고 은근하게 가열해 만든 둘쎄데레체를 바른 것이다. 거기에 디저트는 약간의 단맛을 더해 조린 팥을 얹은 우유 푸딩. 오늘의 식단은 언제나 그렇듯 우유판이다.

완성된 이야기는 아니라 올린 적 없는 오메가버스 + 가이드버스 배경 소설의 외전 같은 내용입니다. 본편은 BL로, 용어는 이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에트와르와 별지기(가이드)의 조합입니다.

브릿G의 스노우볼 이벤트 응모작입니다. A4 한 장을 조금 넘는 짧은 이야기지만 단번에 쓰는 건 오랜만이네요. 내년엔 조금 더 자주 써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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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은 눈이 흩날린다. 흩날린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게, 기록적인 폭설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는 눈 쏟아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전깃줄 위에도 눈이 쌓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일 날씨가 포근하다는 거네요.”
 “아마 내일이면 다 녹겠지.”

 녹는 건 녹는 것이지만, 이정도 폭설이면 한참 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 녹는 속도보다 내리는 속도, 쌓이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아마도 광화문에서 또 스키어가 등장하지 않을까.

 “스노보드는 평지에서 타기는 어려우니까요.”
 “서울 복판에서 크로스컨트리라.”

 따뜻한 라떼 한 잔씩을 손에 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이에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지만 소파는 창 밖을 향하고 있는 터라 마주보고 있지는 않았다. 원래 에트와르와 가이드, 별과 별지기를 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니, 그래도 저랑 베키도 에트와르와 가이드니 문제 없잖아요?”
 “페어가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가이드라고 하기도 뭐하고.”

 베아트리체 위고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물리적인 초능력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능력을 지닌 에트와르들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그들을 지지하고 지탱하는 것은 깊은 연대로 묶인 가이드들. 능력의 조율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연대까지 하다보니 얕게는 정신적 파트너, 깊게는 배우자나 반려로 함께 지내기 마련이다. 베아트리체는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로, 에트와르였던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능력 전이가 일어나 에트와르로서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가이드였다. 가이드가 에트와르의 능력을 함께 공유하는 건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지만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반려와 함께 그 능력이 꽃피듯 개화하여 가이드이자 에트와르로서 활동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려가 사망한 뒤에도 에트와르로서의 능력은 그대로 남고 가이드로서의 활동도 가능하였기에, 지금은 FDI(Foundation D’etoiles Internationales)에서 가이드의 총 관리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다보니 실무진으로서의 활약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더 힘이 될 수 있는 현역 활동을 자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우자가 남긴 아이를 키우고, 아이가 자라 또 가족을 이루고 손자까지 보다보니 요즘에는 예전과는 달리 이런 풍경을 보고 조금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괜찮아요. 뭐, 감상적인 반응을 보이면 어떤가요. 가끔은 뒤를 돌아보며 쉬셔도 좋을 나이잖아요.”
 “아직은 일러. 아직 환갑 조금 넘겼을 뿐이라고.”
 “네네, 올해 한국나이로는 예순 다섯이시지요. 아직 대중교통 무료탑승 안될 나이십니다.”

 진경이 정확하게 찔러오자 베아트리체는 조용히 라떼를 마셨다.

 “그 분이랑 눈이랑 무슨 이벤트라도 있으셨나요? 청혼이라거나?”
 “그런 건 없었어.”

 진경의 질문에 특별히 염색하지 않아 흰색과 회색이 뒤섞인 머리칼을 귀에 살짝 꽂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함께 한 사람이니 뭘 보든 생각 안 날 수 없잖아. 감상적이 된다는 건,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자주 펼쳐든다는 거야.”
 “그러면 또 어떤가요. 앨범 꺼내 보는 것과도 비슷한 것을.”

 진경은 대답하며 잠시 카페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 다른 손님들은 없었고, 계산대를 맡은 모리나 라떼아트에 몰두한 보현이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상담가로서의 업무를 빼먹을 수는 없으니, 대화 도중에 틈틈이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수월하게 읽어내는 에트와르로서의 능력이 이럴 때는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둘러본다 해도, 모르는 사람은 카페 매니저가 둘러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아는 사람들은 업무중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다.

 “나랑 대화하면서 잠시 쉬겠다더니 또 일?”

 베아트리체의 핀잔에 진경은 살짝 웃었다.

 “그야, 업무 시간이니 꾸준히 둘러봐야지요.”

 대답에 살짝 눈을 흘기며 베아트리체는 다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하여간 한국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드물대요. 뭐, 이번도 크리스마스 전에 내리는 눈이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남산이나 궁들은 눈이 금방 녹지는 않을 테니 명동성당이나 혜화동성당 같은 곳은 하얀 장식으로 성탄을 맞이하겠네요.”
 “응, 그럴거야.”

 꾸준히 가야하지만 몇 번 미사를 못간 것에 대한 보속은 마쳤고, 이제 정결하게 1년 중 가장 큰 성탄 미사에 참여하면 된다. 세례명인 그 이름대로 베아트리체는 모태신자였다. 그렇다보니 성탄을 장식하는 이 눈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 치우는 것은 나이 많은 그녀 몫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쯤 손자들이나 조카들은 다들 나서서 성당 주변의 눈 치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계셨네요.”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제레미였다. 일 때문에 본부에 온다더니 업무가 끝난 모양이었다.

 “성당에 눈 치우는 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와서 먼저 가볼게요. 저녁 즈음에는 눈 그친다니 그 때까지는 여기 계세요.”

 “나도 같이 가서 치워도 되는데?”
 “아침에 감기기운 있다고 하셨잖아요? 눈 치우는 거 돕다가 감기 걸리면 안돼요.”

 단호하게 말하며 웃음과 함께 퇴장하는 제레미를 보는 베아트리체의 눈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진경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컸네요.”
 “응, 잘 컸어. 애들도 그렇고.”

 가족 단체 메신저를 보니 제레미의 딸 크리스, 그리고 제레미의 가이드인 요한의 딸 마리아 모두 오늘 눈 치우는 일에 참석할 모양이다. 자신의 별은 아들과 가이드만 남기고 떠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으니 지금의 풍경을 보면 더더욱 부러워할 것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눈을 바라보는 사이 인기척이 났다. 빈 머그 두 개를 반납하러 갔던 진경이, 이번에는 쟁반에 무언가를 담아왔다.

 “단팥죽이랑 런던포그예요.”
 “오!”

 잊고 있었지만 오늘은 동지였다. 1년 중 가장 해가 짧은 날이니 한국의 풍습대로 팥죽을 먹어야 하는 날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참이었다.

 “보현이 어제 준비했다고, 오늘 아침 카페에서 살짝 끓여 준비했어요.”

 진경이 내려놓는 팥죽에는 팥 몇 알을 고명으로 얹었다. 거기에 달달한 단풍나무시럽향과 얼그레이의 향이 뒤섞어 올라오는 잔이 함께 놓이니, 아침에 느꼈던 감기 기운도, 창 밖의 추운 풍경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고마워, 잘 먹을게.”

 오늘의 동지, 크리스마스 전전날도 포근하게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베아트리체는 심술궂은 미소를 띄우며 생각했다.

 ‘그러니 더 부러워하라고요. 저는 여기서 더 즐겁게 보내다 갈 거니까요.’

먼저 비쉬트 가 이야기부터.

이쪽은 비교적 최근에 작성한 이야기입니다. 그 최근이 언제냐면, 올해. 그것도 올 여름 전후에 써서 짧게 마무리한 것이니 작성 속도는 굉장히 빨랐습니다. 맨 마지막의 짧은 후기부터 짚어 보지요.


뭐라해도 우성알파인 페넬로페는 미인이다. 올리비에에게는 경애의 대상이었을 것.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일찌감치 공작가를 이끌어온 인물이며 관리자적 측면이나 본인의 업무적 능력, 개인적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 자신은 그렇기 때문에 호감은 있어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상황.

바라만 보던 인물이 프로포즈를 해왔을 때, 상대의 손을 잡아도 될 것인지 고민하는 부분은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로맨스소설이 그러하듯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ㅁ-/ 무엇보다 먼저 반한 쪽은 페넬로페고, 프로포즈도 페넬로페가 먼저 했고, 그만큼 가장 아껴줄 것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킹. 아니, 확실한 할리킹.



올리비에의 이름은 한창 제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온 섬의 궤적 등장인물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보다 훨씬 앞서 『황금박차의 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따옴. 같은 올리비에지만 이쪽은 더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보낼 것임.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소설에서 다루고 싶었던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평등에 가까운 국가, 다른 하나는 여성 알파, 그리고 인공수정. 인공수정 건은 보다가 짐작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근 조아라에서 연재 완결된 퍼즐나비의 『별을 따는 방법』을 보고 떠올렸습니다. 오메가버스는 대개 오메가가 임신하고, 대부분이 BL이다보니 남성 오메가가 임신을 합니다. 여성의 임신이 등장하는 오메가버스는 제가 읽은 중에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기획단계부터 여성의 임신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 당시 제 타임라인에는 여성이 임신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제 생각도 그랬습니다. 즉, 일정 이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특히 왕이나 고위 귀족은 여성인 경우 임신하면 출산 전후로 3개월 가량은 권력의 누수를 겪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측근이 있고 관료제 사회라 잠시간 자리를 비워도 되는 시스템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그리고 일 중독자인 경우라면 임신을 거부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니까 육아보다 직장이 우선하는 셈.

거기까지 생각하니 인공수정을 통해 반려인 오메가에게서 자식을 보는 여성 알파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알파의 이미지에서, 『아이고, 폐하!』에서 나온 것처럼 대대로 여성 알파만으로 이어지는 마녀의 가계를 떠올렸고요. 마녀는 우성 알파이며 자식은 거의 딸이고 우성 알파라는 설정은 거기서 유래합니다. 그 때까지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알파임에도 가주인 공작이 임신했지만 페넬로페는 다릅니다. 임신보다 일을 선택하고 배우자로 자신을 대신해 임신할 오메가를 두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그 뜻을 꺾었다가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소설이니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것처럼 올리비에는 『황금박차의 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지만 결국에는 주인공을 대신해서 사망하며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지략가이며, 알스란 전기의 나르사스와 굉장히 비슷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기본이 기사이기 때문에 체력은 상당하지요. 열성 오메가라는 이미지와는 안 어울리지만 이름만 따왔다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공작가에서 일한다는 것은 사실상 지방공무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비쉬트 가는 광역시급이니 광역시의 공무원..? 그러니까 능력도 중간 이상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한은 정년이 보장됩니다. 대신 연금은 없다고 설정했습니다.




별과 길잡이는 그보다 훨씬 전에 쓴 소설입니다. 이건 첫 파일이 언제쯤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모티브가 된 소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설 자체도 한참 전에 읽었지요.

S의 추천으로 봤다고 기억합니다. 구입해서 모셔두었다가 서가 압박으로 방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으라면 못 읽을 소설입니다. 현대로맨스였지요.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도 할리킹에 가까운데, 개인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가정불화 등을 겪은 여주인공이 직장 상사와 연애하면서 일도 잡고 사랑도 잡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결말이 문제였습니다. 에필로그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애인이 힘든 것을 못보겠다'는 상사의 의견으로 여러 업무에서 밀립니다. 그리고 업무 강도가 낮고 매우 편한 일로 배정을 받습니다. 거기에 여주인공도 동의를 하더군요.

후일담에서 스쳐 지나가듯 나온 내용이었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올라갔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나? 나이도 어린데, 사랑에 성공했다면서 거기서 접는 거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배치를 돌린 상사도 능력 있는 사람의 날개를 꺾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높은 강도의 업무를 선택한 이유 자체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편한 삶으로 내려가도 문제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 소설의 결말에 대한 불만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가이드버스가 아니었습니다.

가이드버스로 개작 전 제목은 「異-또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특수기사단에 배속된 에이드리언은 팀장인 세실과 만나고 연인관계가 되었다가 헤어지고 3년 뒤 재회해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랬던 이야기를 가이드버스로 바꾼 겁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룹니다. 하나는 한쪽의 일방적인 호의가 상대방에게 악의가 된 상황과 그걸 끊어내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해 나가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연애에 서툴렀던 사람들이 첫 매듭을 잘못 묶었다가 풀고 다시 묶는 이야기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그 3년간의 유예기간 동안 길잡이는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되었고 에트와르는 일방적인 송신자에서 송수신을 모두 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었고요.




양쪽 모두 뒷 이야기가 더 있지만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다듬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 된 이야기부터 먼저 내놓고 다음 이야기들은 짤막하게 덧붙일 겁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 더 두고 봐야죠.;

태초에 신이 있었습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계속해서 둘러보았습니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번성하고 그 안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등장하고, 대립하는 존재들이 나타날 때까지 신은 꾸준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모형 정원 안에서 인간이 다른 존재들에게 밀려 멸종 직전까지 가자 신은 별을 내려 보냈습니다.

 “너희들이 가서 도와주거라.”

 신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너희들은 인간과 섞이지 못하고 분리되겠지. 너희와 인간을 연결할 길잡이들을 찾아라. 찾아서 너희의 짝으로 삼으면, 그 짝들도 마찬가지로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길잡이가 없는 별은 강한 힘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통제하기가 어렵겠지만, 길잡이가 있으면 원래의 힘을 다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길잡이 역시 너희의 힘을 나눠 받을 수 있을 거란다.”

 신은 별들이 혹시라도 인간을 해치거나, 인간이 별을 해칠까 걱정하여 별에게 금제를 걸고 그 열쇠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려간 별들은 길잡이를 찾아 훌륭히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신은 다시금 모형 정원의 진화를 감상했습니다.


-그림책, 『신과 별과 길잡이』에서.



 바는 적당히 어두웠다. 입구에 들어서며 세실 패러코트는 직원에게 겉옷을 맡기고 가장 안쪽을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누나 엘렉트라는 먼저 와서 한 잔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동생이 옆자리에 앉자 엘렉트라는 온더락잔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세실은 같은 것으로 한 잔 주문하고는 잔을 비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술기운을 빌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묻자, 엘렉트라는 통과되었다고 답했다.

 “전출 사유 자체가 부적응인데다 마침 북부 기사단에도 맞는 자리가 있어서 이견 없이 발령 건이 통과되었어. 오늘 최종 결재까지 완료되었으니 내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통보될 거야. 근무는 다음 달부터고. 당장 내일부터 정리하고 준비하겠지.”

 가능하면 늦게 가기를 바랐지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길잡이를 구할거야?”

 엘렉트라가 물었다. 세실은 고개를 젓고 술을 한 잔 더 주문하고는 대답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길잡이로 생각하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가이딩을 부탁하거나 약으로 버티거나.”
 “약으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잖아. 게다가 에이드리언은 종신 길잡이였으니, 에이드리언이 없으면 네 능력 발휘에도 문제가 생길거고.”

 엘렉트라의 지적은 날카로웠지만 세실은 단단히 결심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중에 에이드리언이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게…….”

 말을 끝맺기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실은 뒤통수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바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렉트라는 세실의 뒤통수를 갈긴 손을 털며 감정을 꾹 억누른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이 미저리 같은 자식아.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보고 입 열어. 넌, 에이드리언의 경력을 끊었어. 에이드리언은 저 바닥부터 올라와 특수기사단에 배속된 노력형 기사였고, 길잡이가 아니어도 뛰어난 인재야. 그런데, 네가 길잡이라며 과보호하며 위험한 프로젝트에서 배제하고, 복잡한 프로젝트에서도 제외하고, 그저 자신의 옆에 있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주지 않으려 했잖아. 그건 보호가 아니라 속박이고 압박이야. 특수기사단에서 부적응으로 타 기사단에 넘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네 놈이 끊은 건 경력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도다.”

 에트와르, 또는 에스테르. 신에게 힘을 받았지만 핸디캡을 가진 별로서 길잡이를 만나고 그와 짝을 이룬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길잡이가 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서로를 서로의 짝으로 인정하여 각인하면 길잡이들도 별과 함께 상당한 능력 상승을 가지며, 그에 따라 자신의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 짝이 막 되었을 무렵의 세실과 에이드리언은 이상적인 파트너쉽을 보였으며 능력의 상승이나 발휘, 그리고 페어로서도 훌륭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을 보호하고자 하는 세실의 마음이 점차 강해지며 그게 속박이 되자 페어는 무너졌다.


 무너진 것은 에이드리언의 마음이었기에 초반에는 가이딩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연이어 박탈당하고 세실의 가이드로서만 보호받는 상황이 되자 에이드리언은 항의를 시작했다. 둘의 충돌은 곧 가이드 효과의 박탈로 나타났고 이는 세실의 능력 저하, 그리고 에이드리언에 대한 보호 강화로 나타났다. 악순환은 에이드리언이 특수기사단의 부적응을 이유로 전출 신청을 넣으면서 끊어지는 듯 보였다. 세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관련자인 기사단장 세실은 결재선에서 빠졌으며 다른 특수기사단원들의 동의를 얻어 상부로 올라갔다. 그리고 중간 결재권자인 행정부 인사처장 엘렉트라에게까지 닿았다. 엘렉트라의 결재가 끝나면 그 다음은 의례적인 결재권자인 행정부 장관의 결재만 남는다. 엘렉트라가 승인했다는 것은 에이드리언의 이동이 결정되었다는 것이었고, 최종결재마저 끝났다는 것은 둘의 결별만 남았다는 의미였다.


 엘렉트라는 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온갖 말들을 한숨으로 모아 내뱉고 이번에는 가볍게 마실 한 잔을 주문했다. 술이 나올 때까지 세실은 아무 말 없이 빈 잔만 만지작 거렸다.


 “보내 보고 도저히 안 되면 그 때는 그 다음에 생각할거야. 일단 한 달을 버티고, 두 달을 버티고, 반 년을 버티고, 일 년을 버티고.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할래. 일단 버티는 것이 목표야.”
 “길잡이 자리는 비울 거라고?”
 “응.”


 엘렉트라는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을지 모르지만 형제가 둘 다 에트와르라면 길잡이 파장이 어느 정도 공유된다니까 집으로 들어올래?”


 뭐라 해도 형제다. 나이 차이도 적지 않아 둘의 사회 경험 차이도 상당했다. 엘렉트라는 에트와르로 태어나 일찍부터 길잡이를 만났으며 그 길잡이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두었다가 사별했고 현재는 새로운 길잡이와 짝을 이루고 있다. 이제 마흔을 갓 넘겼지만 그간 겪은 사회 경험은 웬만한 사람들보다 더 길고 깊었다. 그렇기에 길잡이를 잃거나 떠나보낸, 다시 말해 물리적이나 심정적으로 거리가 멀어진 길잡이를 둔 별들이 보이는 행태도 파악하고 있었다. 세실이 어느 쪽일지는 알 수 없지만 에트와르에 대한 연구에서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스트레스와 비슷하거나 더 하다는 내용이 많았다. 만일의 일을 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엘렉트라에게 자식이 있기 때문에 작위 계승권은 낮아질 예정이지만 아직 자식들이 성인이 아니며, 성인이 되어야 정식 후계자로 지명이 되므로 아직 계승 1위는 세실이다. 또한 엘렉트라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차기 후계자의 후견인이 되는 것 또한 세실이므로 가주인 엘렉트라는 세실의 상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길잡이를 떠나 보내지만 그러한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는 세실 역시도 상황을 받아 들였다. 어차피 정신적으로 몰려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안정된 환경을 찾는 것이 좋다. 조카들이 있고 완벽히 맞지는 않지만 상성이 평균 이상일 길잡이, 프레데릭이 있을 옛 집, 누나의 집이 좋다.


 “응. 대강 정리하고 가능한 빨리 들어갈게.”


 그리고 가능한 빨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에이드리언을 떠나 보낸 뒤의 허전함을 견디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견디고 다시 잃어 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쫓아갈 수 있을까.


 ‘그건 그 다음에.’


 세실은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며 우울한 얼굴로 그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남쪽 성벽 위에 서면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보게 된다. 남쪽 저편, 수도가 있는 그 어딘가. 에이드리언은 남쪽에 있을 누군가를 잠시 떠올렸다. 형이나 형수가 알면 서운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해는 할 것이다. 그가 수도에서의 생활을 모두 손에서 놓고 떠나온 것은 그 때문이니까.


 “또 보냐.”


 뒤에서 제랄드가 등짝을 후려갈기며 말을 걸어왔다. 잠시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보려 했더니 방해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그 심정은 이해한다. 에이드리언이 그렇게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마치 우울한 곳으로 빠져 들 것 같으니 어서 빨리 나오라고 그러는 것이고. 그런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은 별개. 일단 맞았으니 그에 상응하여 갚는 것이 도리다.
 잽싸게 제랄드의 다리를 걸어 기우뚱 휘청거리게 만들고는 에이드리언은 씩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심통 부려봐야 기사다 보니 제랄드도 금방 무너진 몸의 균형을 되찾았다.


 “걱정 안해도 돼.”


 제랄드는 그 곳에서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곳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에이드리언, 브리앙, 그리고 세실. 형수인 도로테아는 아마 브리앙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부부가 이혼했다. 왜 이혼했는지는 모르지만, 단 둘이던 형제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뉘었다. 형은 아버지에게, 동생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이혼이 성립되자마자 북쪽 저 끝 지방에 전출 신청을 하고 형을 데리고 가버렸다. 아주 살가운 형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칼로 무 썰 듯이 갈라질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았던 형제는 가끔 서로를 떠올렸지만 그 둘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변경지역으로 전출했다가 몇 년 뒤에야 수도로 돌아온 아버지와 형의 사정 때문이기도 하고, 이혼한 뒤 타국 사람과 재혼하면서 아이를 떠난 어머니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재혼 소식에 아이는 다른 나라로 가고 싶지 않다며 제 발로 보육원에 걸어 들어갔다. 자기 스스로 가족을 버리는 것이 버림 받는 것이나, 타국에서 외면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하며.


 ‘같이 갔다가 학대 받는 것보다는 어쩌면 고아원에서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보육원에 머무는 언젠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지만 이건 자기 위안이자 자기 위로였다. 그 뒤 어머니에 대한 소식은 들은 적이 없고 그 뒤에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타국으로 떠나버린 혈육을 일부러 찾아서 무엇할까. 그것도 스스로 끊어낸 혈연인데.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옮긴 직장에서 형을 만났을 때도 담담했다. 형은 긴가민가했던 모양이지만 동생, 에이드리언은 브리앙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 다 실력으로 이 곳, 특수기사단에 들어왔고, 혈연을 강조하며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건 핑계이고 아는 척 했다가 또 외면당할까봐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특수기사단은 업무의 특수성 때문에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가능했다. 평범한 생활을 해왔다면 들어오기 더 어려웠을 텐데, 버림받았기 때문에 더욱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던 것도 있고 보육원에서 나와 하루라도 빨리 홀로 서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 덕에 아카데미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하고, 장학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노력했다. 그 덕분에 노력파 수재라는 평가를 받으며 아카데미를 예정보다 더 일찍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에서 1년 근무한 뒤 특수기사단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전출 신청으로 북쪽 레사비크로 넘어온 것은 2년 전, 특수기사단에서 3년간 근무를 마친 뒤였다.


 ‘그러고 보면 열여섯 아슬아슬하게 졸업해서 열일곱은 기사단에, 스물까지는 특수기사단에. 아직 내가 어린애 취급 받는 것은 당연한 건가.’


 옆에서 장난을 걸어오는 제랄드를 밀어내며 에이드리언은 성벽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이제 슬슬 순찰을 나가야 할 시간이다.



 형은 무난한 길을 걸어왔다고 들었다. 물론 본인의 말이니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특수기사단 2팀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섯 살 위의 형 역시 비슷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모양이었다. 같은 아카데미에 있지는 않아서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형은 몸 쓰는 일보다는 머리 쓰는 일에 익숙해 주로 교섭이나 외교와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었다. 교섭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특수기사단에 파견되었지만, 원래는 외교부 소속 공채 인원이었다고 했다. 은테 안경 때문에 더 무섭고 차갑고 이지적인 인물로 보인다는데, 다른 안경으로 바꾸라 해도 부득불 말을 듣지 않았다. 기사단 내에서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일부러 쓰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테아 누나의 옆에서는 안경을 벗거나 무테 안경을 쓰고 있는 일이 많았다. 누나는 무테 안경 쪽이 더 좋다고 하는데 업무할 때만 은테를 고집하는 것을 보면 그 차가운 이미지를 업무용으로 고정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틀리진 않는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형이 없었다면 특수기사단에서의 마지막 생활을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형이 그런 상황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 이미 세실과 자신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애초에 틀어졌다고 표현할만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어떤 관계였는데?”


 사과술이 담긴 유리잔을 가볍게 흔들며 제랄드가 물었다.


 “별과 길잡이와의 관계는 보통 연애 감정이라고 하잖아. 서로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어쩌면 제랄드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좋아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동경과 선망과 존경이라는 감정을 호감이나 사랑 같은 감정과 분리해서 보지 못했다. 우정은 알았지만 그 이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부러 선을 긋고 대했다. 그렇기에 좋은 집안 출신으로 특수기사단 2팀의 팀장인 에트와르가 자신을 가이드라며 손을 내밀었을 때 들었던 감정이 선망하고 동경한 인물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대한 우쭐함 혹은 보람이었을지, 아니면 그 이상의 좋아한다는 감정이었을지 나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걸 분리하는 것은 어려웠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제랄드도 이런 대답이 나올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살 연상이지만 졸업 동기로,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왔으니까. 다만 제랄드는 고향이 레사비크, 정확히는 현 근무지에서 4km 가량 떨어진 산골 마을이라 졸업한 뒤에는 바로 이곳으로 돌아왔다. 아카데미 시절 같이 친하게 지냈던 다른 친구들 역시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나온 뒤에는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다.


 “그래도 여자친구는 있었잖아.”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내가 먼저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적은 없지.”


 제랄드는 에이드리언의 대답에 곰곰이 그 간의 연애 사정을 곰씹어 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에이드리언이 사귀었던 사람은 총 넷. 그 중 셋은 여자였고, 한 명은 남자였다. 남자는 제랄드보다 한 기수 위의 선배였으나 에이드리언과의 관계는 그리 길게 가진 않았다. 여자 둘은 그 선배 전, 한 명은 그 선배 후였는데 어느 쪽이건 간에 모두 상대방이 먼저 에이드리언에게 사귀자고 제의하여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넷 모두 에트와르는 아니었다. 애초에 길잡이로 지목된 것은 세실이 처음이었다. 에트와르와 길잡이의 관계가 모두 다 연인 관계는 아니므로 그 결연과 연애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도, 사회경험이 많지 않은 세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런 속내를 숨긴 채 제랄드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 왜, 전형적인 바람둥이 아냐?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


 결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새신랑, 제랄드가 입을 삐죽이자 에이드리언은 피식 웃었다. 고향 마을에서 기다린다던 제랄드의 애인은 끝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더니 아카데미 생활 마지막 해에는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졸업 직전에 청혼도 했다고 한다. 다만 예비 배우자의 나이가 어려, 자리를 잡고 또 돈을 모으기까지의 몇 년 간을 더 기다린 셈이었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을 날은 그리 머지않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땠는데.”


 제랄드는 지금까지 세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듣는 귀가 많았고 에이드리언의 상처는 컸다. 현재 기사단 내에서는 특수기사단의 업무가 과중했던 데다 마지막 임무에서의 부상이 커서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신청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은 기사단장과 제랄드뿐이다. 이렇게 소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당사자의 신분이 높은 것도 한 몫했다.


 세실 패러코트. 그 당시에는 특수기사단 2팀의 팀장이었지만 지금은 특수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다. 좋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누나가 집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에 있는 사람. 에이드리언보다는 열 살 위로 훨씬 경력도 길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자신과는 달리 노력형 수재가 아니라 타고난 천재인 사람. 그런 사람과 자신이 별과 길잡이로 엮일 줄은 몰랐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굉장히 들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험한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을 배려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 업무 배제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자신을 떼어 놓고, 견제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프로젝트의 실행 업무가 아니라 보조 업무로 돌렸을 때는 당황했다. 그리고 길잡이기 때문에 동거하고, 연인이라는 공표를 들었을 때는 더욱 힘들었다. 학당시절 에이드리언과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한 질투, 그리고 개인 신변에 대한 강한 집착과 훼방, 직장 내에서의 의도적인 고립으로까지 이어진 상황에서 3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오랜 세월을 홀로 버텨온 에트와르고, 자신은 그런 에트와르에게 유일한 나침반이 될 수 있는 길잡이이기 때문에 더욱 인내하려 했다. 하지만 인내도 한계가 있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겠다며 전출 신청을 내고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는 이미 대인기피가 일어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형이나 예비형수가 없었다면 그런 자신에게 갇혀 삶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꾸준하게 제랄드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은 어떻게 보면 세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어떻게 보면 세실과의 관계를 끝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제랄드의 편지는 세실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에이드리언에게는 피난처였으니까.


 “학당 졸업 전엔 너 철벽으로 소문 나 있잖아. 오는 사람 자체를 철저하게 막아버리는. 애초에 인간관계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너 은근 인기 많았다?”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리 반가운 소리는 아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얌전히 생활하기를 바랬거늘,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은 없다. 이미 예전 일이고 지금은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지금까지는 꺼낸 적 별로 없었잖아. 이렇게 술안주로 삼은 적도 없고. 이제 괜찮아진 거야?”


 직설적으로 물어본다는 것은 제랄드의 단점이기도 했지만 장점이기도 했다. 말을 쉬이 꺼낼 수 있었으니까. 에이드리언은 조금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따뜻하게 데운 사과주를 한 잔 주문하고 입을 열었다.


 “온대.”
 “…어?”


 주어는 없지만 지금까지 화젯거리가 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주어가 누가 될지는 뻔했다. 제랄드는 어제 아침에 있었던 전체 기사단 회의에서도 별 말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다음 전체 회의는 일주일 뒤. 그리고 기사단장 회의는 어제 전체 회의 후에 있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전달 회의는 없었다.


 “단장님이 개인적으로 말씀해주시더군.”


 회의에서의 공식 발표만 생각했는데, 단장님께 따로 들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정보를 듣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은 기사단의 임시 부단장이자 현 단장의 비서 겸 보좌관이니까. 인원이 적은 기사단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지만, 특히 에이드리언은 현 단장의 보좌관으로서 비서 역할도 맡고 있다가, 부단장이 출산휴가를 간 사이 부단장 업무도 맡고 있었다. 부단장 업무라고 해봤자 단장이 하는 일을 분담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보좌관이나 비서 역하고도 겹친다. 하여간 그렇다보니 그 사람이 온다는 사실을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알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직 결연은 그대로지?”
 “응.”


 에트와르와 길잡이간의 결연이 끊어지면 둘 다 알아차릴 수 있다. 매번 성벽 멀리를 바라보는 것도 그 결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 3년간 세실은 결연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에트와르 세실의 길잡이는 여전히 에이드리언이었다. 에트와르와 길잡이가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할 때의 결연은 심리적 상황의 영향을 받지만 거꾸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심리적 관계가 굳어져 결연이 유지된다는 연구도 있었다. 하여간 특수기사단에 근무하는 동안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학당 다닐 때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한 덕에 아직도 그런 연구 내용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달짝지근하게 입에 붙는 술을 홀짝이며 에이드리언은 말을 이었다.


 “단장님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로 전해주신 거라더군. 그리고 결연을 끊을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것도 좋을 거라며. 3년이 되었으니 그 뒤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괜찮아?”


 제랄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에이드리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특수기사단과 여기는 소속도 다르니 뭐라 훼방도 못 놓을 테고. 그걸 허용할 단장님도 아니고. 솔직히 다시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 때의 감정이 연애 감정이 맞았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도 하고.”


 제랄드는 한숨과 함께 손을 뻗어 에이드리언의 머리를 부들고는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랑 크기는 비슷한 이 머리통에 뭘 그렇게 많이 담고 돌리냐.”
 “뭔 소리야, 내가 더 작지.”


 에이드리언의 대꾸에 둘은 마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 때쯤 에이드리언은 생각난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올 때쯤이면 부단장도 복귀할 테니까 나보고 방문하는 동안 임시로 그 사람의 부관을 맡으라더군. 이번 방문은 공식적인 방문이라기보다는 업무 교류 차원이라 전속부관이 안 따라 온대.”
 “그럼 말이 부관이지 뒤치닥… 그렇다면 그 사람이랑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거 아냐.”


 군사 기밀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이야기다보니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그런 거지.”
 “그렇다보니 괜히 감상에 잠겨서 탑에 올라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고.”
 “내가 한 감수성 하잖냐.”


 그런 감상에 잠긴 것만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대꾸하는 에이드리언을 보고, 제랄드는 저리 치우라면서 에이드리언의 머리를 저 멀리로 밀어냈다. 장난과도 같은 손놀림에 에이드리언은 힘없이 쓰러지는 척하며 바에 엎어져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술 마시는 거고?”
 “그래 봐야 취하지도 않아.”
 “술이 아깝다 야.”


 제랄드는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술고래에 말술인 친구를 보고 불평했다. 하지만 술고래에 말술이기 때문에 매번 기사단 회식 때마다 뒤처리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보다는 조금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래도 말야. 지금 생각하면 별로,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긴 해. 만나 봐야 알겠지만. 또 결연이 어떻게 영향을 줄지도 봐야 아는 거고.”
 “난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거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걸.”


 제랄드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두 달 뒤, 제랄드는 말로만 듣던 중앙군 소속 특수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세실 패러코트를 볼 수 있었다. 주변에서 소리 없이 속닥이는 것처럼 패러코트 단장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깨선에 찰랑 거리게 닿는 검은 머리칼은 살짝 갈색 빛이 돌았고, 눈은 그것보다 조금 밝았다. 피부색은 특별히 하얗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평범한 색들이 평범한 외모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색은 평범하지만 외모는 굉장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얼핏 보기에는 여리기도 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인이었다.


 북부군 소속 기사들은 특수기사단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사람도 많다보니 단장인 세실 패러코트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어서, 다들 직함에 놀라고, 나이가 생각 외로 어린 것에 놀라며, 외모를 보고 놀랐다. 하지만 패러코트의 2년 후배라고 하는 부단장 마리 비블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례를 하며 패러코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오랜만이군. 졸업 이후로는 처음이던가?”
 “그럴 겁니다.”


 약간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에 비블린은 뒤에 서 있던 기사, 에이드리언을 소개했다. 에이드리언은 무덤덤한 얼굴로 경례를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앞으로 옮겨 안았다. 이번 방문 동안의 일정과 관련된 브리핑 자료였다.


 “에이드리언은 설마 기억하시겠지요?”


 약간 웃음기 어린 말투에 세실은 아주 조금, 옅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지만 자주 보았던 얼굴이 그렇게 변했다는 점에 에이드리언은 아주 조금 서운했고 조금 안도했다. 시간은 사람이 바뀌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되는 모양이다.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좋군. 하지만 술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기억하는데.”


 세실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에이드리언은 가볍게 웃었다.


 “집에서라면 괜찮습니다. 밖에서는 취하기 싫어서 별로 마시지 않았으니까요.”
 “집으로?”


 술집이 아니라 집으로 초대했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다.


 “밖에 나와서 술 마시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임시 전속부관이라지만 일개 평기사인 제가 단장님과 같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내키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제가 단장님의 길잡이라는 것을 모르니까요. 거기에 집에 술도 있고 술안주 거리도 그럭저럭 있으니 편하게 마시는 것이 좋지요. 술에 취해도 집까지 더 찾아갈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더 빨리 취한다고 덧붙이자 세실이 피식 웃었다. 결연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웃는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술렁거렸다. 답은 대강 나왔다. 다시 보면 알 것 같았지만 지금의 얼굴을 보면서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예전보다 감정 표현이 많아지신 것 같군요.”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표정이 더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그 자세한 의미는 다음에 물어보면 된다고 미뤄두고, 에이드리언은 앞장서서 집으로 향했다.



 종종 생각하지만, 집은 소중하다. 안식처이자 피난처인 공간이다. 그건 어머니와 헤어져 복지시설에 있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자신을 위한 작은 공간 하나 얻지 못하던 그 때는 정말로 힘들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은 그래도 자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 있었지만, 정주할 곳은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순간 그곳을 나와야 한다. 그 때문에 에이드리언은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면서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다. 수도의 집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절약하고 또 절약했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수도에서 지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일이란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니, 여유자금은 떼어놓고 적당한 가격으로 집을 구입했다. 이것이 첫 집이라 생각하니 더 애틋한 마음에 신경 써 고른 곳이 여기였다. 무엇보다 욕실 하나, 침실 두 개, 거실 겸 식당 하나, 부엌 하나가 있는 집이 이 정도 가격이라면 수도에서는 꿈꿀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출 온 지 반년 만에 마련한 집은 이제는 익숙하고 또 아늑했다.


 “의외로군.”
 “어떤 부분이요?”


 혼잣말 같았지만 무심코 이유를 물었다. 에이드리언은 괜히 물었나 싶었지만 잠시 말을 고르던 세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깔끔하고 온기가 돈다고 대답했다.


 “같이 살 때도 이정도로 정리는 하고 살았는 걸요.”
 “하긴.”


 동거하던 당시에는 같이 근무를 하지만 업무 시간은 에이드리언이 조금 더 길었다. 회의 등으로 초과근무를 하는 일이 많아 에이드리언이 집안일을 조금 더 많이 했다. 어차피 에이드리언도 혼자서 집안일을 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고 전문가를 써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청소와 음식 등을 맡겼기 때문에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기야 일하는 다른 사람이 있으니 단정한 집안을 유지하는 것은 그 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은 생각을 거기서 끊었다. 오랜만의 인연이고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다보니 계속 생각만 많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손님을 거실로 안내하고 침실로 들어간 에이드리언은 제복을 벗어 걸어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손님이다 보니 평소 입는 것처럼 잠옷을 입고 나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겠습니까?”


 거실로 도로 나오니 세실은 거실에 연결된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높은 층이라 야경이 좋은 편이었다.


 “갈아 입을 만한 옷이 있나?”
 “형이 두고 간 옷도 있고, 제랄드가 두고 간 옷도 있고, 제 옷도 있습니다. 사이즈는 아마 제 옷이 제일 잘 맞을 겁니다.”


 에이드리언이나 세실이나 체격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세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에이드리언은 갈아입을 평상복과 제복을 걸어둘 옷걸이를 건넸다. 그리고 자신은 부엌으로 들어가 술안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실이 옷을 갈아입고 제복을 잘 정리해서 거실 한 쪽의 옷걸이에 걸어 두었을 때, 에이드리언이 맥주와 마른 안주, 그 외 안주 거리를 이것저것 들고 왔다. 부엌에서 소리가 계속 들린다 싶었더니 고구마전과 애호박전, 두부김치가 함께 나왔다.


 “맥주에는 안 어울리는 안주 아닌가?”
 “뭐든 배를 채울 수 있으면 상관 없지요.”


 주로 독한 술을 마실 때 어울리는 안주들이었지만 에이드리언은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차갑게 식힌 맥주의 뚜껑을 열고 건배를 한 뒤 한 모금 마시자, 싸한 기포들이 목구멍을 자극했다.


 “역시 북쪽이군. 보리나 밀은 남쪽보다는 북쪽에서 주로 생산되니까.”


 세실의 말대로 레사비크 근처에는 유명한 맥주 양조장들이 많았다. 수도에 있을 때는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지만 여기 와서는 일주일에 몇 번씩 맥주를 마시다보니 안 그래도 말술인 주량이 더 늘었다. 제랄드랑 마시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고, 회식도 근무를 핑계로 자주 빠졌다. 그래도 몇 번에 한 번 정도는 회식을 하지만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그렇게 힘들지 않다. 대신 아침형 인간이라 아침 근무가 많다는 이유로 늦게까지 남아 있는 일은 드물었다. 술이 약하다는 핑계로 예전에는 자주 회식을 빠지거나 일찌감치 구석에서 잠들었지만 술이 약하다기보다는 생활습관의 문제였고, 제랄드와 마음 놓고 마실 때는 술고래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여간 회식 때는 술을 잘 안마시고 버티다보니 빠르게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종종 뒤처리를 맡기도 했다. 회식이 늦으면 대개 한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가 나중에 누군가가 깨우면 뒷정리를 도와주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으니.


 이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세실 앞에서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존경하는 상관, 그 다음은 무서운 상관, 그리고 에트와르. 그 다음은… 아니, 거기까지 생각할 것 없이 굉장히 어려운 존재였다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볼 때는 길잡이를 보호하겠다며 실력 있는 부하의 그 앞길을 막아버린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험악한 관계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 그게 아주 틀린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렇지.”


 에이드리언의 말에 세실이 수긍했다.


 “길잡이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에 휘둘려 더 많은 경험을 얻어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사의 손발을 꽁꽁 묶어 놓은 셈이니까.”


 그런 집착이 별과 길잡이의 관계에서인지, 아니면 연인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당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거를 하고 이미 육체적인 관계까지 넘어선 관계였고, 길잡이는 아직 초보였던 데다 사회경험도 적었다. 사회경험이 많았다면 관계를 돌이키거나 바꿀 수 있는 방안을 떠올렸겠지만 에이드리언은 일방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것이 잘못된 방식이고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은 동료들과의 관계가 거의 끊어지고 고립된 뒤에야 깨달았다. 극단적으로 상황이 흘러 간 건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길잡이와, 관계에 미숙했던 에트와르의 문제였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사태를 방관한 팀원들의 문제도 있었고.’


 사태가 불거진 것은 에이드리언의 친형이자 파견 팀원인 브리앙의 강력한 항의 때문이었다. 브리앙이 직무연수를 받느라 외교부로 복귀한 사이에 에이드리언은 업무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되었고 다른 팀원들과의 대화도 거의 차단되다시피 했다. 브리앙은 재파견 후 상황을 파악하고는 앞선 업무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1차로 당사자들 앞에서 지적했으며 팀원과 에트와르 팀장, 길잡이의 동의를 얻어 상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길잡이도 전출을 신청했다.


 “그래서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건가요.”


 상황이 종료되고 1년이 채 되기 전, 세실은 브리앙에게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고. 브리앙과 에이드리언이 형제지간인 건 문제제기 하던 그 날에야 다들 알았을 것이니 둘 사이의 기묘한 친밀감도 그 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질문에 세실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만약 거기서 제동을 걸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니까. 너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봤고.”
 “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요. 형이 없었다면 진짜로 놓았을 거라고 가끔 생각하니까요.”


 에이드리언의 대답에 세실이 움찔거렸다. 상상하는 것과 그걸 직접적으로 말로 듣는 것은 다른 모양이다.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가이딩 받으셨나요?”


 의외로 스스럼없이 질문이 나왔다. 입 밖에 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술기운을 빌리니 생각보다 쉬웠다. 대답하는 세실 역시 별다른 동요 없이 답했다.


 “본가로 들어갔어. 누나 길잡이가 상성은 그럭저럭 맞으니까, 100%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은 도움이 되었지. 나머지는 약으로.”


 세실의 누나가 엘렉트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북부 기사단으로 발령 내는 것을 허가한 당사자라는 것도 들은 적 있다.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가기 전, 형의 소개로 만났고 그 때 그런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프레데릭이라고, 현 인사처 부부장이야. 누나 바로 아래. 같은 사무실을 쓰고만 있어도 가이딩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증명하더군.”


 긴장도가 높은 직종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낮은 업무담당자는 직접적인 가이딩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실제 연구 결과로도 발표하도록 도와준 이가 엘렉트라였다. 동생인 세실이 오랫동안 길잡이가 없어 고생했기 때문인지, 엘렉트라는 에트와르와 길잡이의 관계에 대한 양적 질적 연구를 지원하는 펀드를 꾸려왔다. 가문에서 운영하는 재단을 통하기도 하고, 제국내 공적 연구 재단을 통해 지원하기도 했다. 사적 재단으로 시작해 공직에 올라서는 강력하게 공적 연구를 주장하여 에트와르와 길잡이들의 처우를 개선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내일은 근무가 없나?”


 상 위에 놓인 것은 빈 맥주병 여섯 개. 사이좋게 반씩 나눠 마셨으니 충분히 들어간 셈이다. 거기에 강도를 높인다며 집에 보관하고 있던 위스키도 살짝 섞었으니 도수는 꽤 높았다.


 “정상 출근입니다. 슬슬 정리해야겠군요. 침대는 하나지만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절대로 저 입에서 자고 가라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세실은 병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던 에이드리언은 그 시선을 느끼고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왜 세실이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아채고는 웃었다.


 “제게는 이미 늦은 시간이라 그렇게 말씀 드렸는데. 편한 대로 하셔도 됩니다. 바닥에서 주무시기에는 허리가 아플 테고, 침대가 작긴 하지만 같이 잔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마지막은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말이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톤에 세실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마지막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왕창 부은 탓일까. 자리에서 일어나면 시찰단 숙소까지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에이드리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가이딩도 해드립니다.”


 선택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일어난다면 가기 전 약을 먹어야 하던 터라 가이딩도 해준다는 말에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럼 여기서 자고 가지.”
 “칫솔을 챙겨 드리지요.”


 에이드리언은 씩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전광석화처럼 양치질을 하고 나온 그의 손에는 새 칫솔이 들려 있었다. 그걸 받아 들고 욕실로 들어가자, 그 사이 술상을 빠른 속도로 치우는 것이 보였다. 느긋하게 양치를 하고, 세수까지 마치고 나오자 이미 거실은 아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설거지도 모두 끝낸 뒤였다. 정리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생각했는데 거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뒤에는 침실에서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잠옷을 건네주었다.


 “편한 옷이라 해도 잠옷으로 갈아 입으시는 것이 편할 겁니다.”


 자기 전에 어떤 모습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모를 리가 없다. 바른 생활 사나이인 세실은 에이드리언과 관계를 가지고 난 뒤에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잠이 들었으니까. 세실은 묵묵히 잠옷을 받아들고 에이드리언이 자리를 비켜주기를 기다렸지만 에이드리언은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을 도로 닫고 커튼을 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상의를 벗었다. 당황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다며 허둥대는 사이에 에이드리언은 잠옷 상의를 입고, 마찬가지로 바지도 벗고 난 뒤 잠옷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옷을 들고 거실의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부끄러워 하지 마시고 갈아 입으시고요.”


 놀리는 말투에 울컥 화가 난 세실은 평상심을 가장하고 잠옷으로 갈아 입고는 마찬가지로 옷을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2년 만의 동침이었다. 단어 그대로 같은 잠자리에 들었던 것뿐이지만, 실낱같은 기대감을 품고 머나먼 북쪽 땅 끝자락까지 찾아온 세실에게는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려던 그 때처럼 세실은 에이드리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침대 길이가 아슬아슬해서 몸은 구부려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세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평온한 가이딩 속에서 잠들었다.


 후임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원자가 없는 레사비크의 북부 방위사령부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세실 패러코트가 북부 방위사령부로 전출 신청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수도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유부녀와의 관계가 남편 때문에 파탄이 났기 때문에 전출하는 것이라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 직전에 벌어진 극비 작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현직에서 물러나 북쪽에 요양 가는 형태가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들면 둘 다 해당되지 않는 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특수기사단의 패러코트 부단장이 목석에 망부석이라는 것은 군내에서 정설로 굳어져 있었으며, 최근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겨울이 긴 북쪽이 아니라 수도 남부 쪽으로 가거나 아예 휴직을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실상 부상이라는 것도 아주 심하지는 않았으며, 옆구리를 조금 깊게 베이긴 했지만 정양만 잘 하면 후유증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왜 패러코트가 북쪽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입막음 당할 터이니까.



 “그래서 저한테 허락을 받으러 온 겁니까.”


 무슨 일인지, 세실이 긴히 할 말이 있어 집에 찾아오겠다고 하기에 허락했더니만 나주산 배를 한 상자 들고 왔다. 무언가를 사들고 올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사들고 와서 하는 말이 에이드리언에게 다시 한 번 결연을 신청하러 가겠다는 거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도로테아는 뱃속의 아기가 염려될 정도로 폭소를 터뜨렸고, 브리앙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치솟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말을 건넸다. 세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라기보다는 통보로 들리는데.”


 같은 부서에, 상관과 부하 관계이지만 사석에서는 앙숙지간이었다. 아니, 앙숙이라면 볼 때마다 서로 물어 뜯으려 하는 관계이니 조금 다르다. 현재 둘의 사이는 서로를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에이드리언의 특수기사단 발령 초기에 세실이 에이드리언과 브리앙이 깊은 관계라고 의심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에이드리언과 브리앙이 사이좋은 형제관계를 회복한데서 1차로 강화되었고, 에이드리언에 대한 세실의 태도가 비뚤어지면서는 2차로 강화되었으며, 에이드리언이 전출신청을 낸 3년 반 전에는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브리앙이 세실의 방문을 허락한 것은 최근에 에이드리언이 보낸 편지에서 세실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이 없었다면 아무리 같은 부서에서 오래 근무했고, 브리앙이 아주 가끔 세실의 별지기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관계라 하더라도 사적인 방문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보라고는 해도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레몽이잖아요.”


 에이드리언을 레몽이라 불러도 되는지 어떤지, 하여간 도로테아는 에이드리언을 레몽이라 부르고 있었고 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로테아만 쓰는 별칭이었다.


 “일단 관사로 들어가긴 하겠지만, 가능하다면 에이드리언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한숨을 내쉬며 세실이 말했다. 그 얼굴이 참으로 우울해 보이는 것이, 브리앙은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사이가 안 좋은 만큼 저런 모습을 보니 더욱 더 고소하다.


 “그래서 허락할거야?”


 동갑내기 부부는 앞에 있는 손님에게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아니, 뭐. 내가 허락하고 말고 자시고, 본인이 좋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냐?”
 “의외네. 난 반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본인의 의지라니까. 본인이 좋다고 하면 반대할 생각 없어. 다만, 이 일로 에이드가 상처를 받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기사단 서열 3위답게 서늘한 표정을 하는 순간 주변의 기온이 10도쯤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싹해지는 기분에 도로테아는 소름이 돋은 팔위를 열심히 문질렀다. 그걸 눈치챘는지 브리앙은 미안한 얼굴로 아내의 팔 위를 살살 쓸어 주었다. 그 눈꼴신 모습을 직격으로 보고 있던 세실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눈앞의 커플은 그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용서는 받으셨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다. 용서를 빌었다면 용서를 받아야 결연을 하든 말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도로테아가 세실을 바라보자 세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아니 드물다 못해 보기가 아주 어려운 모습에 도로테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이미 브리앙 역시 침울해하는 세실의 모습에 아주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실은 마치, 소금을 팍팍 뿌려 절인 파처럼 풀이 팍 죽어있었다. 한창 나이의 부단장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딩을 받지 않아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신경질적이거나 날 선 모습을 보였지 저렇게 늘어진 모습이지는 않았다. 희귀한 반응을 보고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그 다음에는 폭소가 치고 올라오려는 탓에 부부는 억지로 눌러 가라앉혔다.


 “부단장은 포커페이스는 되지만 연기는 안 돼. 그건 내가 알아.”


 결정하는 것은 에이드리언이니 받아줄 때까지 알아서 빌고 열심히 깨지라며 세실을 돌려보낸 뒤, 세실이 들고 온 배를 잘라 깎으며 브리앙이 말했다.


 “안 돼?”
 “아니, 못하는 거지. 얼굴 표정 감추는 거야 평소 표정대로 굳히고 있으면 되지만, 자신의 감정을 바꿔서 표현한다거나 하는 건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 그리고 오래 같이 근무하면 그럭저럭 얼굴 표정도 읽을 수 있는데, 특수기사단은 오래 근무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몇 안 돼.”


 예쁘게 깎은 배를 포크로 찍어 건네주나 도로테아가 고맙다면서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다른 쪽을 브리앙의 입 가까이 대어 베어 물게 도왔다.


 “맛있다.”


 평소에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북쪽으로 간다면 한동안은 볼 일이 많지 않을 테고, 업무적으로 만나 데면데면하던 사이가 확 틀어진 것은 에트와르와 길잡이의 보호자라는 사적 관계와, 뒤 이어진 업무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적으로 시작해 공적으로도 에트와르와 길잡이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에트와르와 길잡이의 형이라는 관계도 보통 수준까지는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에이드리언이 세실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준다, 즉 다시 결연한다는 전제하의 이야기다. 맨 앞의 전제인 용서한다는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도로테아와 브리앙의 대화는 그런 결론으로 끝맺었다.
 다행히 그 얼마 뒤에 에이드리언은 평소와 같은 안부편지에 슬쩍 세실과 동거한다는 내용을 흘려 적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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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분석 글은 이후에.'ㅂ'

 비쉬트 가는 오래된 공작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우성알파로만 대를 이은 집안으로 또한 유명하다. 비쉬트가 우성알파로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 우성알파의 특질 때문이기도 하다. 알파와 오메가의 특질은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별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나, 단 하나 예외가 있다. 마녀는 모두가 우성알파이며, 마녀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우성알파이다. 그리고 이 우성알파는 반드시 마녀다. 여성 우성알파의 자식은 알파건 오메가건 관계없이 우성이 나올 확률이 남성 우성알파보다 높은 편이나, 우성알파의 존재가 통계적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은데다 우성알파들은 자식의 수도 많지 않다.


 마녀들은 우성알파 중에서도 특이 케이스로 볼 수 있으며 특히 딸은 반드시 마녀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대부분의 마녀 연구는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바, 공개된 것은 비쉬트 가의 혈족 연구뿐이다. 비쉬트 가의 사례연구는 아예 연구자들이 대를 이어서 진행하는 가계 프로젝트로 이루어지며, 처음에는 비쉬트 가 자체적으로 진행했지만 현재는 국가 주도의 연구재단에서 지원을 받는다. 처음에는 우성알파의 존재를 추적하여 더 많은 우성 형질을 낳기 이한 용도로 국가에서 주도하였지만 형질에 따른 관리가 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많아지자 가계 연구나 단순 추적 연구의 형태로 바뀌어다. 비쉬트 가에 대한 연구는 유전적 연구 외에도 마녀라는 집단과 존재의 계보 연구도 함께 하여 역사학과 유전학의 통합 연구로도 유명하다.


 “그냥 눈이 가더라.”


 그는 건넨 찻잔을 받아 들며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무릎 위에 찻잔받침을 얹고는 한 모금 홀짝이고 있노라니 혼잣말 같은 독백이 연이어 튀어 나왔다.


 “애초에 난 아기 낳을 생각이 없고, 그러니 오메가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베타를 좋아할 줄은.”


 고개를 숙였다가,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눈이 간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는 계속 눈으로 쫓고만 있단 말야.”


 다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아으!”


 마지막의 절규를 끝으로 감정폭발이 소강상태가 될 것으로 보여, 그는 다 마신 찻잔을 내밀었다. 역시 알아서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진한 수색이라 우유를 한 큰술 섞었다. 녹차에 우유를 넣는다니 희한한 입맛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유 섞는 것도 나름 즐길만 했다.


 “그냥 데이트 신청하고, 정말로 괜찮다 싶으면…….”


 얼굴로 날아오는 시선이 느껴져 그는 그대로 고개를 들고는 방어했다.


 “나보고 낳아오라는 말은 하지마. 난 할 생각 없어.”
 “알아, 아니까….”


 다시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광분하다가 다시 좌절하다가. 애초에 데이트 신청도 교제 신청도 하지 않았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일인극과 함께 구구절절 풀어 놓고 있는 걸 보면 흥분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해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모두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 그저 다 털어내고 자신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맡은 역은 방관자이고 관객이다. 영명한 이 분은 이 극을 멋지게 해결할 능력이 있다.
 예상했던 대로 10분쯤 뒤에는 진정된 모양인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이 보였고 식은 차를 맛없다면서 한 입에 털어 넣은 뒤에는 한숨과 함께 다음 단계를 내놓았다.


 “일단 데이트부터 신청할래.”
 “그래라. 다음에 만날 때면 결과 나오겠지?”
 “아마도.”


 해탈한 목소리였다. 20분 동안 쏟아 냈다고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앞이 아니면 이런 모습은 보일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도 고개를 끄덕여 이해한다는 몸짓을 보였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한다는 생각은 했다. 페넬로페는 공작이고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 비체스는 대대로 마녀가 공작이었으며 자신도 마녀다. 비체스가 공작이 되고, 공작가가 되고, 공작의 영지를 받은 것은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은 마녀들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차별들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 상징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다음 후계자도 마녀를 두어야 하며 그럴려면 집안을 뒤져 마녀를 찾거나 마녀인 양자를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대대로 공작들이 그러했듯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 것이나 페넬로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일이 더 소중했고 아기보다 우선했다. 자신이 아기를 낳지 않아도 배우자가 낳는다면 문제는 없다. 따라서 오메가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상호합의하에 최근 확대되고 있는 인공수정시술을 한다. 이것이 올리비에를 만나기 전의 생각이었다. 이 모든 계획이 무너진 건 그야말로 눈이 갔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올리비에가 혼자 있는 것은 확인했다. 보좌관인 레이몬다 밀런은 집사와 협의할 것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올리비에는 올해의 장부 결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리도 거의 끝낸 모양이라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올리비에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펴자 페넬로페는 기다리지 않은 척, 열린 문 사이를 슬쩍 들어가 문을 두드렸다.


 “어, 공작님.”


 잠시 긴장이 풀려 있던 몸은 다시 뻣뻣해졌다. 아직은 어려운 모양이라 생각하며 페넬로페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장부 결산 중이었나보지?”
 “예, 마무리 작업까지 끝내서 이제 제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던 그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혹시 차 좋아하나?”


 좋아하는 것은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다. 홍차를 좋아하며, 새로 열린 찻집은 나중에라도 한 번씩 다 방문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마침 이번에 찻집 하나가 내부 공사 후 개장한다고 하여 예약을 잡아 놓은 터였다. 예상했던 대로 올리비에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홍차를 제일 즐기지만 차라면 관계없이 대부분 다 좋아합니다.”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서 홍차향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끝을 은은하게 스치는 향. 무의식중에 주변을 훑었지만 홍차는 없었다. 장부가 있어서 혹시 젖을까 그랬는지 책상 위에는 빈 컵마저도 없었다.


 “음? 뭐 찾으십니까?”
 “아, 아니, 갑자기 홍차향이 나는 것 같아서. 착각인가.”


 페넬로페의 말에 올리비에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 페로몬일 겁니다. 가끔 흥분하면 조절을 못해서요.”
 “페로몬?”


 ‘페로몬? 페로몬이라고?’


 대답을 듣는 순간 페넬로페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어, 그러니까 내가 온 것은, 그러니까, 이번에 동백아가씨가 재개장을 한다 해서, 같이, 음. 가자고.”


 말을 계속할수록 홍차향이 점점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올리비에의 표정은 점점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페넬로페의 말이 끝나고 적막이 몇 초간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데이트 신청이라고 이해하면….”
 “아니, 데이트 신청은 아니고, 아냐, 맞아. 원래는 데이트 신청하고 좀 더 알아갔으면 했는데….”


 말이 꼬이면서 점점 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트 신청이 아니고 그 다음 단계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 번 더 상황은 꼬였다.


 “했는데라고 말씀하시는 건….”


 올리비에 역시 적당한 단어를 찾기 어려운 모양인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냐, 중요한 건 데이트가 아니니까. 결혼이지.”


 사고쳤다. 말이 튀어나온 순간 페넬로페는 등 뒤에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끼며 자학했다. 평소에는 이런 성격이 아닌데, 정확하게 말을 전달하고 확실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상관이지만 데이트 신청하는데 이렇게 진땀을 빼는 건 이상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의 원흉은 페로몬이었다. 베타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터라 페로몬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 그 자체가 실례되는 행동이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 못했던 것이지만.


 “그거,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 신청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까.”


 안 좋은 쪽으로 마구 뻗어 나가던 생각은 올리비에의 말에 순간 멈췄다. 가지를 뻗어 나가던 자괴감이 도로 착착 접혀 상자 속에 쏙 들어가 밀봉되었다.


 “……응.”


 정리하면 그렇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차츰 알아 나가면서 하면 된다. 일단은 데이트부터.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


 첫 번째 데이트 약속은 정신을 차린 페넬로페가 앞서 말한 동백아가씨의 재개장에 맞춘 예약일로 잡았다. 둘 다 급한 일은 해치워 놓고 편한 마음으로 가자고 약속했던 터라, 그 사실을 몰랐던 보좌관 레이몬다가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며 좋아한 건 덤이었다. 첫 데이트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해서 페넬로페는 외부 일정 후 약속 장소에 가기로, 올리비에는 그날 휴가를 마치고 나가기로 했다. 다만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페넬로페가 먼저 선을 그은 터라 복장은 찻집에 어울리는 간편한 복장으로 말을 맞췄다. 정장이 아니라 그보다 가벼운 차림, 갈색의 긴 바지에 차이나 칼라의 흰셔츠였다. 페넬로페도 그와 비슷하게 발목 가까이 오는 긴 치마와 셔츠를 챙겨입고 있었다. 서로 마주할 일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주문할 음료와 디저트에 대해 말문을 트면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라지만 그런 문제에 신경을 안 쓰는 페넬로페와, 그런 페넬로페를 알고 있는 올리비에는 찻집에 놀러온 일행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 개인적인 일을 묻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어느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어떤 것이 궁금하신가요?”


 직원이 우려 내온 포트를 기울여 차를 따르며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말을 고르던 페넬로페는 포트를 내려 놓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페로몬, 홍차향인가요?”
 “아, 네.”


 더 무서운 질문인 줄 알고 긴장했던 모양인지 올리비에는 빙긋 웃으며 긍정했다.


 “그렇다면 오메가……?”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 하기야, 원서에 그 내용은 적는 곳이 없었지요.”


 올리비에는 취직 전에 적어 냈던 서류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확실히 공작가에서 제출을 요구한 서류에는 형질을 묻는 내용이 없었으며, 공작가 의료실을 담당하는 직원 주치의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런 개인 정보는 엄중히 관리되고 있으니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보고가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작가는 그런 개인정보의 관리 문제는 엄격했다.


 “열성오메가라 향이 짙지는 않지만 홍차향입니다. 아마도 실론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다즐링은 아닐거예요.”


 ‘열성오메가.’


 페넬로페는 올리비에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왜 자신이 베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열성오메가라면 히트사이클의 주기도 몇 달 간격으로 길다보니 휴가를 내더라도 눈치챌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향도 약하고, 페로몬 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베타로 착각할 정도였다. 우성오메가는 페로몬 우성알파와 비슷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훨씬 더 강하고 히트사이클의 주기가 훨씬 짧기 때문에 눈치채기도 쉬웠다. 애초에 우성 인자를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레 알아차리기 쉬웠다.


 “솔직히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 때 횡설수설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건 당황해서 였습니다.”
 “네?”
 “베타라고 생각했거든요.”


 올리비에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 갈무리를 잘한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보다는 원망에 가깝죠.”
 “네?”


 페넬로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투덜댔다.


 “오메가인줄 알았으면 고백 진즉에 했을 겁니다. 베타인줄 알아서 한참을 망설였고요.”


 궁금증이 어린 올리비에의 얼굴을 보고 페넬로페는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올리비에의 페로몬 향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새콤한 향이 코 끝에 다가왔다.


 “전 임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후계자는 얻어야 하니까 인공수정에 동의하는 오메가를 배우자로 맞을 생각을 했지요.”


 페넬로페가 우성알파이고 마녀다보니 페넬로페가 낳는 여아는 무조건 우성알파다. 지금까지 앞선 공작들이 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페넬로페가 알파나 베타의 배우자를 맞아 당연히 아기를 낳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성알파라 해도 여성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없었다.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개 보조적 기구 등을 이용하여 임신에 성공한 결과이고, 그 수도 사례 보고가 될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이 발달하면서 실험실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하여 이를 오메가의 태에 착상시키는 일도 많았다. 이 덕분에 남성 알파간의 결합을 제외하고, 태를 갖고 있는 쌍인 남성과 여성, 오메가와 알파간의 다른 모든 조합은 아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여성 알파라면 오메가가 아니라 남성과 배우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아연한 얼굴로 대답하던 올리비에는 말을 되짚어 보고 퍼뜩 시선을 맞췄다. 이 말인 즉, 그 이전부터 자신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본인의 뜻을 꺾고 스스로 임신할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페넬로페의 간접 고백에 올리비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가릴 셈인지 올리비에가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더 직접적으로 고백할까요. 지난번에 이미 이야기하긴 했지만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습니다.”


 올리비에의 얼굴은 찻잔으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이 보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 못할 페넬로페는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말로 듣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 그럼에도 페넬로페가 올리비에에게서 직접 답을 들은 것은 그보다 훨씬 뒤에, 얇은 반지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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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해도 우성알파인 페넬로페는 미인이다. 올리비에에게는 경애의 대상이었을 것.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일찌감치 공작가를 이끌어온 인물이며 관리자적 측면이나 본인의 업무적 능력, 개인적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 자신은 그렇기 때문에 호감은 있어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상황.

바라만 보던 인물이 프로포즈를 해왔을 때, 상대의 손을 잡아도 될 것인지 고민하는 부분은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로맨스소설이 그러하듯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ㅁ-/ 무엇보다 먼저 반한 쪽은 페넬로페고, 프로포즈도 페넬로페가 먼저 했고, 그만큼 가장 아껴줄 것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킹. 아니, 확실한 할리킹.



올리비에의 이름은 한창 제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온 섬의 궤적 등장인물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보다 훨씬 앞서 『황금박차의 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따옴. 같은 올리비에지만 이쪽은 더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보낼 것임.


절세마녀님 댁에서 받아온 글쟁이 바톤. 오랜만의 바톤입니다.'ㅂ'

0. 글을 쓰고 계십니까?
네.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글, 일기도 글, 소설도 글. 글은 자주 쓰고 있습니다.


1. 글을 쓸 때, 먼저 정하고 쓰는 것은?
①사건 ②인물 ③배경(지리, 문화, 역사 등등) ④기타 

장면. 혹은 대사나 상황.
예를 들어 급격하게 티타임이 땡기는데 그걸 차리기엔 번거롭다거나, 티타임에 뭘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싶을 때는 소설 주인공을 시켜 그 상황을 만들고 하나하나 차립니다.(...)


2. 글을 쓸 때의 버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라고 써놓고 보니. 일기에 소설을 쓸 때는 반드시 파란 볼펜을 씁니다. 그 볼펜이 아니면 안나와!는 아니고, 파란볼펜으로 써놓지 않으면 나중에 일기를 뒤졌을 때 찾을 수 없습니다.(...)


3. 글을 쓸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는? 
①워드프로세서 ②인터넷 게시판 ③타자기 ④원고지, 노트 ⑤기타 

블로그에 쓰는 글이야 보통 글쓰기 창을 열어놓고 하지만 가끔은 메모장을 꺼내씁니다. 소설은 항상 아래아한글을 꺼내 놓고 씁니다. 블로그에 옮길 때도 아래아한글에 쳤던 것을 복사해서 옮깁니다. 반드시 아래아 한글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출력시의 문제로... 따옴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또 일기장에 쓰지요. 노트 + 검은 볼펜의 조합입니다.
 

4. 글의 분량은 대충? 
①주로 단편 ②주로 장편 ③쓰다보면 대책 없이 길어진다. ④그때그때 달라요 ⑤기타


주로 단편. 장편은 단 한 편도 없었 ... 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 때 썼던 장편들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그대로 무덤까지 들고 가야하기 때문에..;
사실 글쓰기의 분기점은 1999년으로 잡고 있는데, 그 이전에 쓴 소설은 흑역사이며 그 이후에 쓴 것만이 현재 디지털로도 남아 있습니다. 그 이전 것은 다 아날로그예요.
여튼 1999년에 쓴 제대로 된 첫 소설(시발점)은 중편이었고 그 이후에 쓴 소설은 모두 掌편입니다.


5. 글을 쓸 때, 설정은 언제 합니까? 
①쓰기 전에 완벽하게 ②쓰면서 ③내 사전에 설정이란 없다!! ④기타 

쓰면서. 그렇기 때문에 설정은 그 때 그 때 바뀝니다. 앞 뒤가 안 맞는 이야기도 자주 나오지요. 단편이라 망정이지 장편이었으면 아마 앞의 설정을 뜯어고치느라 골치 아팠을 겁니다.
설정이 바뀌기 때문에 묻어둔 단편도 꽤 있습니다.


6. 설정을 글로 써 둡니까? 
가볍게 소설처럼 쓴 것은 있겠지만, 따로 쓰진 않습니다. 주로 단편 소설의 끝부분에 간략히 설정을 남기는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소설을 100% 즐길 수 있는 것은 저뿐입니다. 왜냐하면 전 미싱링크를 모두 알고 있거든요. 냐하하! (...)


7. 글을 왜 쓰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만족.
음, 그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제 스트레스 지수의 파악도 가능합니다.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캐릭터중 누가 뭐하고 있으면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나 싶은 거고..
 

8.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까? 
엄, 아마도?
시오노 할머니 같은 동인녀(...)가 되는 것도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자면... 목표로 하는 작가라고 하기보다는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누군지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이 글을 보지 않을 사람이예요.-ㅂ-;


9. 주로 쓰게 되는 장르가 있습니까? 
현실계 판타지.
판타지는 판타지인데, 배경이 현실세계입니다. 완전히 판타지인 것과 배경이 현실세계인 것이 나뉘어 있지요.

 
10. 자신의 첫 작품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제목은 기억 안나는데, 찾아보면 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11. 첫 작품의 분량은 어느 정도 였나요? 
원고지 20매였나.


12. 첫 작품의 장르는? 
SF.(...)


13. 첫 작품과 지금의 것을 비교 했을 때, 자신이 성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다지...; 지금 생각하니 비슷한 수준이군요.ㄱ- 게다가 그 다음에 썼던 소설들도 그랬어.;ㅂ;


14. 글을 쓸 때,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히는 강박관념이 있습니까?
엄, 먹을 것. 제 이야기에서 티타임이 빠지면 이야기 진행이 안됩니다. 먹는 이야기가 안 들어간 게 드물 정도.; 먹는 장면이 들어가는 것이 많은데, 밥보다는 간식류라는게...


15. 자신의 글의 주인공을 더 좋아하십니까? 조연을 더 좋아하십니까? 
제 이야기에는 주연 조연이 따로 없습니다. 어떻게보면 그게 문제라능....
이 이야기에서는 조연이었다가 저 이야기에서는 주연. 이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주인공이니 조연이니가 따로 없습니다.


16. 글의 등장인물은 남자가 더 많습니까? 여자가 더 많습니까? 
남자.ㄱ-
언젠가 여자를 늘리려고 이모저모 노력을 해보았는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남초 현상이 좀 심해요.


17. 가장 길게 써 본 글의 분량은? 
글세요. 따져본적이 없는데. 아마 99년에 썼던 그 이야기가 가장 길겁니다. 그게 대략 A4 19장 정도였던 듯.


18. (개인 홈피라도) 연재중인 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연재중인 것은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 소설은 단편 위주라서요. 미완의 단편도 몇 개 되지만서도.;


19. 누군가 당신의 글에 출판 의뢰를 해온다면?
북극지방에서 씩씩하게 자라고 있을 나무를 위해 거부하겠습니다. 종이낭비를 넘어서, 나무가 불쌍합니다.


20. 특별히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 있습니까?
딱히 없습니다. 하지만 밤보다는 낮인듯. 


21. 자신의 글에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LOVE..? (탕!)
아마 일상일겁니다.


22. 한 번에 쓰는 글의 분량은? 
①한 번에 몰아 쓴다. ②짧게 끊어 쓴다. ③기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단편(엽편)이므로 한 번에 몰아씁니다. 가끔 시간이 없으면 끊어쓰기도 하지만 그럼 맥도 같이 끊기더군요.

 
23. 지금까지 써온 글의 개수는? 
좀 많은데, 저도 수를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


24. 그 중에 완결작의 비율은? 글을 완결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장편은 대부분 미완입니다. 단편은 완결 비율이 높아요. 쓰다 만 것이 한 손에 꼽을 정도인가? 그것도 올 여름내로 써야겠지요.
 

25. 자신이 좋아하는 시점이 있습니까? 
3인칭 전지적시점. 제일 어려운 것은 1인칭입니다. 몇 번 써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26. 자신이 자신의 글의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면 어느 것이 좋습니까? 
①주인공 ②조연 ③엑스트라 ④전능한 방관자(나레이션) ⑤기타

... 이미 등장해있습니다.-_- 4번이예요.

 
27. 자신의 글을 다른 매체로 바꾼다면 무엇이 가장 적합합니까? 
글세요.; 제 머릿속에서는 항상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이지만 그걸 실제로 본다면 좀. 아마도 만화나 그림책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28. 등장인물이나 지명을 포함한 모든 이름은 어떻게 짓습니까? 
판타지 이름을 지을 때는 주변에서 찾는 물건의 철자를 바꿔 쓰지만, 현실세계 주인공의 이름은 한자로 짓기 때문에, 이름에 부여하고 싶은 속성(...)의 부수 + 한자의 의미를 고려하여 이름을 짓습니다.


29. 글을 구상하거나 쓸 때는 어디를 자주 이용하십니까? 
걷기 운동할 때 가장 잘 떠오릅니다. 혹은 출 퇴근 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이미지가 잡히면 그걸 잡아 몇 번이고 반추하고, 그걸 글로 옮깁니다.


30. 자신이 쓰는 글의 삽화를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G를 시켰습니다.(먼산) 하지만 지금 G는 펜을 놓아버려서.-_-; 그래도 기본적인 이미지는 G가 그려준 이미지입니다.
저도 몇 번 시도해보았는데 그림은 안되더라고요.


31. 글쓰기가 아닌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글읽기. 글쓰기보다는 그쪽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32. 퇴고에 신경 쓰는 편입니까? 
네. 하지만 아무리 퇴고를 해도, 해도, 해도, 오타는 남더군요. 100% 없애는 방법이 있긴 한데, 출력하는 겁니다. 세 번쯤 출력해서 꼼꼼하게 보면 99.9%에 가까운 완성도가 나옵니다.


33.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쓰고 있다보니 글 쓰고 싶어집니다.-ㅁ-
마무리 못짓고 있던 소설들을 마무리 지어야겠네요. 이상하게 늘어졌던 것도 정리하고.


34. 다음 바톤은? 
아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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