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일기 내용이니 사진만은 발랄한 것으로. 사실 이거 일기장에 써야하는 건데 블로그에 남기는 건.. 음..




실패했을 때의 반응은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제는 그럭저럭 감정을 다스리는데 성공했다. 그게 실패한 것은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 스위치를 눌렀기 때문이고. 그 뒤의 주변 사람 반응도 스위치가 눌린 상태로 계속되는데 한 몫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 실패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모르더라.

내가 폭발한 말은 딱 하나였다. 내 앞 자리에 앉은, 내 선배이기도 한, 꽤 친한 누님이 그러시더군.

"(다른 사람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해!"


기획안 프리젠테이션이 결국 실패한 것을 내 모든 잘못으로 끌어 안고 있었던 찰나였다. 지적받은 사항은 모두 정당했고 난 방어하지 못했다. 방어에 실패한 것은 내 잘못이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을 상관은 누차 주문했다. 방어하지 못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받았으니 그 방향대로 처음부터 다시 쓰면 된다. 마음을 다잡고 당장 내일(지금은 오늘)부터 다시 쓰면 된다. 그 사이에 힐링은 엊그제 도착한 책으로 하자.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울컥하려는 것을 누른 채 술 자리에 갔다. 복장이 정장이다, 평소 그렇게 입고 다녀라, 그렇게 하니 참 좋다라는 말들은 얼핏 내게 지적하는 것으로 들렸지만 넘겼다. 이미 그 때부터 쌓였던 모양이다.

이차저차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나니까.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은 기획안 언제쯤 쓰나 궁금해서 물어보던 와중, 선배가 그걸 듣고는 저 발언을 했다. "너나 잘해!"

그 순간 감정이 폭발했다. 눌러 참고 있었는데 한 번 튀어나오니 어떻게 할 수 없더라. 내가 오늘 프리젠테이션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은 얘가 왜 저러나 당황하고, 그 선배도 당황해서는 '괜찮아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네'라는 말을 하고는 '야, 들어가면서 뭐 따뜻한 거라도 사먹어'라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나에게 쥐어주려 했다.


그 뒤의 상황은 대략, '나도 겪어 봐서 아는데' '나는 기획안 퇴자맞은 것도 여러 번이고 최종 보고서 퇴자 맞은 것도 여러 번이야. 괜찮아. 기획안은 다시 수정하면 되는 거고 그게 잘되면 최종 보고서도 잘 나와' '아니 지적하신 분들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고, 사실 너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기획안의 잘못된 부분만 지적하는거야' 등등의 말이 흘러나왔다. 도움이 되는 말이 단 하나도 없더군.

내 스위치가 눌린 것이 저 '너나 잘해'라는 건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더라. 서러웠던 건, 기획안의 수 많은 지적 사항이 아니라 그런 수준의 기획안밖에 내지 못한 내 능력 부족과, 그에 따른 자기 혐오, 자기 비난, 자기 비판, 자기 검열이었다. 돌아 오는 길에 자신에 대한 끝없는 정서적 학대와 자기 비하를 하면서 정말로 몇 번이고 울컥하는 걸 눌러 삼켰다. 저 두 단어가 누군가의 심장에 도끼를 박아 넣은 것이라는 건 나만 안다. 괜찮을 수 없다. 실패하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그건 성공할 때의 일. 성공할 때까지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는 실패로 남는다. 그것이 무형의 자산이 되든 아니든, 실패를 자기 속에 오롯이 끌어 안는 사람들은 실패를 할 때마다 정신적인 데미지가 매우 크다. 자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절감도 더더욱.


앞서 간 사람도 힘들었다는 건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힘들어서 뭐? 그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나? 다들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겪는 지금 이 상황은 힘든 것이 아닌가?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철골 구조는 남았다고 해도 거기에 벽체를 세우고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힘들지 않은가.

거기에 기획안에 대한 지적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발화도 역으로 칼이 되어 날아왔다. 아니요. 지적은 정당했습니다. 정확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럴진대, 저를 그러한 잘못 지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열한 인간으로 만들지 마세요. 전 그렇게 수준 낮은 인간은 아닙니다. 상처는 받았을 지언정, 그것이 타당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할 정도의 인간은 아닙니다. 당신들이 하는 말은 제게 다 그렇게 들렸습니다. 차라리 말하지 마세요.



그리하여 그 자리를 그 시간에 뛰쳐나오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 용돈은 받았지만 받았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 줄 요약.

-기획안 퇴자맞았다고 화난 것 아닙니다.

-그 정도 기획안밖에 못쓴 제게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너나 잘해 소리 하시면 눌러 놓았던 화가 폭발하잖아요.


덧붙임.

-그런 지적도 못 받아들일 정도로 낮은 인간 아닙니다. 긍정적으로, 방향은 다시 잡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쓰면 되겠다.^ㅁ^고 그 말 듣기 전까지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자기 파괴적 본능이 도로 끓어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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