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이레, 2004

이 책은 첫비행님이 추천해주신 책입니다. 제목에 끌려서 도서관에 신청은 해놓았는데 한 번 펼쳐 보고는 그대로 덮어서 서가에 꽂아 두었습니다. 여행이라는 말에 덥석 집었다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상념기(혹은 깊은 탐색 기록)라서 어렵다는 생각에 내려두었던 것이지요.
초반은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서술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뭔가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읽어 가면 갈수록 은근히 맛이 느껴집니다. 작가가 어딘가를 여행하면서 그 여행에서 떠올린, 혹은 그 여행지와 관련 있는 누군가(대개는 유명인사)와 연결지어 그 사람의 이야기와 여행기록을 병행합니다. 사실 여행기록은 거의 없고, 여행지에서 떠올린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맛이 더 쏠쏠하지요. 종종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유가오카에서 그랬습니다.
지유가오카=자유의 언덕은 원래 그 곳에 있었던 학교 이름입니다. 지유가오카가 지금은 부촌(느낌은 청담동에 가까울듯?)이지만 그 때는 허허벌판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어떤 교육자가 그 땅에 작은 학교를 세웁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고요. 그 학교 이름이 자유의 언덕입니다. 학교 이름이 지명이 된 독특한 경우지요. 지금도 와치필드에서 몽생클레르로 올라가다보면 지유가오카 학원이 보입니다. 물론 처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상당히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처음의 학교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대안학교였으니까요.
이 대안학교가 기억에 남는 것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토토짱-구로야나기 테츠코, 창가의 토토 작가-이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바로 지유가오카 출신이거든요. 지역에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학교 출신인겁니다. 지유가오카 어딘가에 이 학교 기념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마트 앞이라고 했는데 미처 찾아보질 못했지요.

이런 식으로 여행 중에, 여행과 관련이 있는-혹은 여행중에 하는 행동과 관련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이야기를 잡아 채서 글을 쓴 것이고요.

몇 가지 기억에 남았던 장면을 적어볼까요.

p. 205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장소 : 레이크 디스트릭트, 안내자 : 윌리엄 워즈워스

(중략) 앰블사이드에서는 사람들이 신문을 사고 스콘(핫케이크의 일종)을 먹었다. (중략)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호수지방으로, 워즈워스가 신나게 노래한 멋진 지방이자 베아트릭스 포터가 농장을 사서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한-내셔널 트러스트 재단의 시작이 된 곳입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워즈워스를 떠올리면 문학자, 베아트릭스 포터를 떠올리면 일반인(?), 내셔널 트러스트를 떠올리면 사회운동가라고 하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저기저, 스콘에 대한 설명이 너무도 감명 깊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머릿 속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순간 암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역자가 정영목씨인 것을 확인하고 좌절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T-T 팬케이크와 스콘은 재료가 비록 같을지언정 배합 비율과 만드는 법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도대체 왜! 그냥 홍차에 곁들여 먹는 과자라고만 해도 되었을 것을요!
스콘을 두고 영국 웰빙빵이라고 한 모 백화점의 웃지 못할 선전 이후 최대 타격이었습니다.

p.305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장소 : 많음;;; 안내자 : 존 러스킨
(중략)
그러나 사진이 그것을 찍는 사람들 다수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열의는 사그라졌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략)

존 러스킨. 사회운동가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떠올리면 토토로의 숲, 베아트릭스 포터,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데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에게 예술 수업을 할 것,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칠 것이라는 점에서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곧 변질되겠지요. 잘 관찰하기 위해 데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가르칠 것이니까요.
주객 전도.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

이 편을 읽고 나니 미니 스케치북과 연필과 색연필이 땡깁니다. 이렇게 관심 분야를 계속 늘려가면 아니되는데, 왜 하고 싶은 것은 늘어만 갈까요.;
그래도 스케치, 데생이 중요하다는 것은 정말 공감이 갑니다. 사진의 폐해에 대해 지적한 것도 십분 이해하고요. 저 역시 사진의 폐해에 물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먹을 것이 나오면 일단 사진기부터 들이대고, 그것이 어땠는지 기억하려면 사진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이걸 데생으로 남긴다면 훨씬 더 잘,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인데요. 기억은 사진에게 밀어두고 저는 그저 셔터 누르기에 바쁜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도 사진은 멈출 수 없습니다; )


맨 마지막 편인 귀환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도 방여행을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고요. 하지만 같은 방여행이라는 단어를 써도 제가 가는 여행은 다릅니다. 여행 서적을 가져다 놓고, 예전에 여행갔던 기록을 펼쳐 놓고 다시 한 번 그곳을 탐험하는 겁니다. 기억을 더듬어 어느 골목길에 들어가면 어디로 통하는지, 어떤 가게가 나오는지 생각하면서 상상으로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차근차근 노트에 적어보렵니다.
... 스트레스로 인한 여행부족증의 처방전이랍니다.T-T



일단 이 책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습니다. 언젠가 사게 될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름없는 독>을 참고 읽기를 잘했습니다. 음, 다음엔 어떤 책을 읽을까요. 청소부 밥, 7 Seven, 아메리칸 버티고, 25세 인간의 힘만으로 지구를 여행하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열일곱살의 바다 중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고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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