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理想)의 커피가 있듯, 제게는 이상의 당근케이크도 있습니다.

이상의 커피는 꿈의 커피라고도 종종 불렀던 그겁니다. 흙내음이 살짝 풍기는, 굉장히 풍부한 향의 커피. 에티오피아 커피였지요. 아마 지금은 두 번 다시 마실 수 없는 커피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10년 전에 마신 것이니 상상으로만 남아 있고 실제 맛과 향이 그것과 일치하는 커피는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쓰다보니 피천득씨의 「인연」이 떠오르네요. 다만 이상의 당근케이크는 만들면 가능할거라 생각은 합니다. 재료 수급이 불가능한 꿈의 커피와는 달리, 당근케이크는 그럭저럭, 제 입에 맞으면 그걸로 만족할테니까요.

이상의 당근케이크는 꿈의 커피보다도 더 몇 년 전의 겁니다. 고등학교 때, 야자 시간 전 저녁식사는 보통 세 종류의 아이로 나뉩니다. 배달 도시락과 어머니가 싸주신 집 도시락, 사온 도시락의 3종이지요. 저랑 친구 An은 집 도시락파였는데 이 때 An의 어머니가 가끔 당근케이크를 넣어 주셨습니다. 당근이 송송 들어가 박힌, 독특한 향을 내는 케이크였지요. 그게 당근케이크였다는 것은 훨씬 나중에 알았는데, 진한 갈색을 내는 겉부분까지 포함해서 굉장히 맛있었다는 기억만 아련히 남아 있습니다.
지난번에 An을 만나면서 당근케이크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그제야 떠올린 듯 '근데 그 이후로는 먹어 본 적이 없어'라더군요. 아하하하;ㅂ; 역시 고3은 특별합니다.

하여간 그 당근케이크는 언제 다시 만들어보리라 결심만 하고 있었는데 엊그제 G가 갑자기 당근케이크를 시작한 덕분에 저도 끼어서 만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원하는 레시피와는 상당히 달랐으니 그건 나중에 조정해야지요.



오븐토스터로는 못 만든다고 박박 우기더니, 막상 쓸 일이 있으니 그냥 쓰더군요.
베이킹파우더랑 소다가 들어갔다고 기억하는데 저는 나중엔 그냥 파우더만 쓸 생각입니다. 저랑 소다는 잘 안 맞아요. 하여간 생각보다 높게 부풀더군요. 다음에는 70%만 담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ㅂ'




여우털색이라고 종종 부르는 그런 색입니다. 저는 이보다 짙은 색을 좋아하는데 코코아파우더라도 살짝 섞어볼까요. 설탕을 1컵 넣었는데 제 입에는 상당히 달아서 설탕을 줄이고 당근 비율을 높일 생각입니다.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하염없이 휘저어야 하는 레시피였는데 고생한만큼 상당히 폭신하고 촉촉한 케이크가 나왔습니다. 제가 원하는 묵직한 맛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런 케이크도 좋아요. 당근이 한 컵 조금 부족하게 들어간 것도 폭신한 맛의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G 말로는 당근이 더 들어가면 더 촉촉한 맛이 날거라네요. 1/4컵 정도만 추가해야겠습니다.

다음번에 제 손으로 제대로 만들면 그 때 레시피도 슬쩍 올려보겠습니다.'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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