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다른 분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생일 선물이었는데, 그 당시 읽고 싶은 책이 별로 없었던 지라 뭘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교보 1면을 장식하고 있는(...) 하루키 잡문집이 떠올라 신청했습니다. 보통 이런 때 주문하는 책은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책인데 이 경우는 예외였네요. 이 때 주문하지 않았다면 아마 제가 따로 돈 주고 샀을테니 말입니다.
(선물 주신 분의 멘트가 참 주옥 같았지..-_-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위기는 기억합니다.)


표지가 이중이라 보는데 불편해서 나중에 커버를 씌웠습니다. 그 부분 빼면 제책은 나쁘지 않습니다. 책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번역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불만인 부분도 있긴 합니다. 역자 주석이 꽤 많았거든요. 지나치게 친절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건 이런 내용으로 주석 달면 안되는데라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주석은 거의 읽지 않고 넘어갔네요. 그리고 오타도 98쪽에서 한 군데 찾았습니다. 이렇게 투덜거려도 워낙 글이 마음에 들어 전체적인 평가는 높습니다.

잡문집은 처음엔 가칭이었다고 합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그대로 가자며 이름이 그대로 붙었다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도 딱 잡문집입니다. 잡다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지요. 작년에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수상소감도 여기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수상 소감은 고심해서 쓴 티가 팍팍 나더군요.
이 앞부분까지는 지름신이 오실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싶은데, 우왓.; 그 바로 뒤에 붙은 음악 관련 글들은 사정없이 옆구리를 찌릅니다. 허벅지를 찌르며 지름신을 참고 있는데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학교를 적당히 다니다가 학생 때 결혼을 하고 작은 재즈카페를 열었다는 건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을 읽다보면 이 아저씨의 몸은 조깅(마라톤)과 음악(재즈, 클래식 등등)와 글쓰기(소설)로 구성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젊었을 때, 하루 종일 재즈를 듣고 싶어서 재즈 카페를 열어 운영했다는데 생각보다 장사는 잘 되었다고 합니다. 장사를 접은 것은 스물 아홉 때,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니까요. 아쉬워하는 단골도 많았다고 하고요.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이 책 삽화를 그려준 두 사람도 이 재즈 카페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하니.. 꽤 유명했나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재즈에 대한 글이 자신의 생활과 연결되어 굉장히 맛깔납니다. 그것도 다 LP판 중심의 이야기라, 듣고 있노라면 미친듯이 음악이 고픕니다. 그것도 LP판을 올려 살짝 튕기며 들리는 그런 음악. 제가 아는 재즈는 굉장히 범위가 좁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이라고는 스윙 재즈 몇 종이나 빌리 할리데이의 White Christmas 정도가 한계네요.


잠시 딴 소리를 하자면..;
제가 처음으로 이것이 재즈다라고 인식하고 들은 것은 Take five가 처음입니다. 어디서 들었냐면, KTF의 CF 송이었거든요. 아마 대부분 다 기억하실겁니다.
중년 아저씨가 거래처를 방문하기 위해 승용차 뒷자석에 앉아 실려 갑니다. 잠시 정차하는 사이 바로 옆의 인도에 보호구를 착용한 청바지 입은 청년이 곱슬머리(파마머리?)를 휘날리며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스쳐 지나갑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저씨. 그리고 그 아저씨가 거래처 사장실에 들어가자 아까의 그 청년이 사장실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아 서류를 보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는 안성기씨의 나레이션이 들어갔습니다. 내용이 편견을 깨라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배경음악이 David Brubeck Quartet의 Take Five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서태지의 Take Five는 아직 안 나왔을 때일겁니다.'ㅂ'; (아니 나왔던가..) 여튼 이 곡이 처음으로 제게 '재즈'로 각인되고 마음에 든다, 듣고 싶다고 생각한 첫 재즈 음악이었지요. 그 뒤에 조금 영역을 넓힐까 생각했는데 재즈의 영역은 너무 넓습니다. 그냥 카페에 들어가 가끔 듣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지요.

그 다음에 또 재즈로 인식된 것은 『스윙 걸즈』. 이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ㅁ- 스윙이 이거구나라는 걸 이 때 조금 알았습니다. 덧붙여 모 가수의 노래도 스윙을 주제로 한 것이라는 걸 이 때쯤 깨달았습니다. 제목이 스윙인걸 알았지만 스윙이 뭔지 제대로 몰랐으니까요.
 
그런 빈약한 재즈 청력(?)을 가진 저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을 읽으면 마구 당깁니다. 그것도 CD가 아니라 LP로. 재즈는 정말 LP로 듣는 것이 더 맛이 있을 것 같더라니까요. 그래서 첫비행님이 읽으시면 지금의 클래식 LP만으로도 버거우실텐데 이 책을 보고 나면 재즈의 영역까지 손을 뻗칠테고..; 무라카미가 그런 것처럼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LP판이라도, '이런 곳에서 불쌍하게 놓여있구나. 내가 데려가줄게'라면서 이중 구입하는 일도 생길 것 같고...;;
그래서 첫비행님께 추천하기가 무섭습니다.


무라카미의 글맛은 여전합니다. 삐닥한 것 같기도 하고 소심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솔직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전 소설보다는 수필을 좋아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소설도 볼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외 몇 가지 짤막한 감상을 덧붙여봅니다.

- 앞서도 썼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쓴 소설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관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에 따라 다를텐데, 무라카미는 '의미와 맥락만 통하면 문장 하나하나를 감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  22-23쪽에 실린 굴튀김 이론을 보고는 감탄했습니다. 저도 이런식으로 글을 써봐야겠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 옴진리교가 새 이름을 알레프라고 바꿨다고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제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아... 왠지 읽고 싶지 않아.;;; 그러고 보니 옴진리교에 대한 이야기도 잡문으로 들어 있습니다. 옴진리교 같은 사이비 종교 단체가 발 붙일 수 있는 이유에 대한 것인데 나름 공감했습니다. 저야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어느 종교이건 간에 기대고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최근 주변에서 종교(개신교-_-)에 기대는 이유를 알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어서...;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다듬은 다음에 따로 써보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이영미 옮김. 비채, 2011,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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