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신나게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아하하. 늦게 잔 것도 아니고 어제 거의 파김치가 되어서 늘어져 있다가 일찍 들어가 잤는데 왜 그런걸까요. 지금 커피를 마구 들이키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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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이 글 하나 쓰는데 세 번이나 저장하며 쓰게되었고 지금은 졸리진 않지만 그래도 기본 감상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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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제, 어슐러 K. 르귄의 서부 해안 시리즈 마지막 권 <파워>를 다 읽었습니다. <기프트>, <보이스>, <파워> 중에서 도중에 읽다가 건너 뛴 것은 기프트뿐이고 보이스나 파워는 다 읽었네요. 그것도 다른 두 권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보통은 좋아하는 부분만 다시 읽는데 보이스는 다시 읽을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발췌독은 여러 번 했으니 꽤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세 권의 이야기를 꿰뚫고 있는 것은 '나'의 성장기, 그리고 책입니다. 기프트와 보이스, 파워의 도시 국가들은 해당 시점에서 책을 탄압하기도 하고 장려하기도 합니다. 기프트의 세계인 고원지대에는 아예 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기프트의 주인공 오렉에게는 책이 있긴 있습니다. 오렉의 어머니가 만들어준 린넨천으로 된 책. 그것이 고원 지대의 유일한 책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렉 자신도 어머니가 만든 또 다른 책이라 생각합니다.

보이스에서는 책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메메르가 살고 있는 곳은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에 점령당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다, 지배민족이 책을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에 책을 보는 일은 목숨을 거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더 책은 힘을 가지고 또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거기에 걸어다니는 시집(웃음)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급류를 탑니다.

파워에서는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책이라는 것이 상당히 대접을 받습니다. 파워의 지리적 배경은 앞서의 두 이야기와는 달리 많이 바뀝니다. 주인공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흘러가기 때문이지만 어느 지역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책과 이야기, 배움의 존재가치는 많이 변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가비르가 사는 곳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노예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배움의 기회는 많이 바뀌기도 하지요. 가비르는 그 속에서 다른 노예를 가르치기 위한 노예로 길러지며 이차 저차한 상황에 휩쓸려 본인이 강하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새로 또 존재가치를 인정 받아 이야기꾼으로 남지만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돌아간 곳은 자신의 원래 고향입니다. 거기서 환시를 보고, 잠시 딴 짓을 하다가 츤데레 이모의 도움을 받아 길을 떠납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이번 여행은 가비르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꼬마를 만났을 때와, 꼬마와의 교감을 느꼈을 때는 읽는 저도 상당한 희열을 느꼈습니다. 공감하는 부분에서의 희열이 Common People의 공감대 형성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문학적인 이야기를 설파해도 문제가 없는 세상을 사는 모 문학소녀의 이야기와도 겹쳐 보인다면 과장일까요. 하지만 서부 해안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같은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제 읽기를 마친 황야제의 느낌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잘 짜인 태피스트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제 취향에 부합하진 않는 이야기입니다. 추천은 하지만 제 입맛에는 맞지 않았으니, 밝은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이야기꾼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화학약품이 잔뜩 들어 있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공전을 하는 세 단계의 섬이 있습니다. 왕도와 그 주변, 그리고 그 밖의 세계인데 언뜻 보면 중세시대의 질서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왕과 봉건귀족, 그리고 그 아래의 농노 말입니다. 농노들은 위계 질서 속에서 가장 대접을 못 받는 존재이지만 이들이 없다면 귀족이나 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산을 하는 존재가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귀족들은 그러한 사실은 망각한채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데만 급급합니다. 이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으니 암적인 존재로 취급받는 마물입니다. 사람을 잡아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이 마물들은 이야기꾼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야기꾼은 음유시인과도 비슷하게 가면을 쓰고 다니며 여러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역마살이 낀 존재지요. 물론 타고날 때부터 역마살이 끼어 있던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역마살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황야제의 시작은 두 명의 이야기꾼이 황폐한 건물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부터 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 기나긴 동짓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던 이야기는 점차 씨실과 날실로 엮어지며 마지막으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면 중간 중간 등장한 복선들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완전하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번 읽고 나서는 도저히 손이 안가서 그대로 G에게 넘겼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에 약합니다.(먼산)

서부 해안 이야기에 대해서 주인공 아이들이 능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며 상황에 끌려 다닌다라는 지적이 종종 있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그건 어른의 시각이라 생각합니다. 10대 아이들이 능동적이고 자기 스스로 움직이고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등장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렉은 그 나이에 가장 걸맞은 선택을 합니다. 메메르의 선택, 혹은 시선은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아이같습니다. 본인도 중간 중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비르는 성년이 되어 조금은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적고 있고, 그 속에서 가비가 선택하는 것은 상황이 닥쳤을 때 차악의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이고 충동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아이들다운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아이들,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 아이들은 겉모습만 아니고 실제로는 어른이지 아이가 아니죠.



서부 해안 이야기 중에서 궁금한 것 하나. 가비르가 이야기를 전하는 존재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별도의 사람인지가 조금 궁금합니다. 뭐, 그런 부분은 일부러 상상의 여지를 남겼을테고 작가도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말입니다. 안에서 소화한다면 그것은 또 지나치게 작위적일 수도 있겠지요.-ㅁ-



그리하여 구입 여부를 두고 고심중입니다. 다음 서가 방출 때 나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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