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귄, <어스시의 이야기들>, 황금가지, 2008, 15500원

어스시 이야기를 맨 처음 접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주 옛날 옛적이었을거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매는 하늘에서 빛난다'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해적판인 에이스88시리즈였습니다. ... 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먼저 본 것이 에이스88인지, 아니면 웅진에서 나온 파란 표지의 '어스시의 마법사'인지 기억이 안납니다. 어느 쪽이건 간에 고등학교 때 읽었을 것이란 점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웅진에서 어스시 다음권을 내주었을 때는 기적과도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때는 이미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본 것은 나우누리 환동에 올라온 번역본이었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스시 시리즈 다섯 번째 권인 '어스시의 이야기들'은 한국에서의 첫 번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스시는 제 입맛에 100% 맞지는 않지만 이번의 단편은 표지에 홀랑 반해 집어 들었습니다. 표지가 상당히 멋지지요. 드래곤라자의 양장본도 같은 타입인걸 보면 같은 디자이너가 표지를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스테인드 글라스 같은 분위기로, 밝지만 선명한 색을 쓴데다 각 단편들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박혀 있습니다.

단편들은 거의가 입맛에 맞았습니다. 보면서 이 책을 뜯어 다시 제본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표지가 취향이라 차마 뜯지는 못하겠지만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한 어스시 시리즈는 이 책이 처음이군요. 짧기 때문에 주인공이 겪는 고생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고, 힘들지만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입니다. 게다가 어스시 본편의 앞 뒤 이야기를 모두 다루고 있기 때문에도 마음에 듭니다. 작가의 말에는 테하누가 마지막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어스시의 다른 시리즈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았을 때는 종결된 줄 알았던 어스시의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잠자리일테고요. 잠자리는 6권과도 이야기가 이어지나봅니다.

제가 어스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척박한 환경도 그렇고, 어스시의 세계나 '학교'에서의 남녀차별이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어스시뿐만은 아닙니다. 최근에 읽은-읽다가 던진;-기프트도 그렇습니다.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대등하진 않습니다. 옛 생활들은 상당히 남성의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건 알지만 이해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어쨌건 어스시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세요. 왜 현자가 아홉명이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대현자의 자리가 비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시대가 나오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가를 비우려고 하니 다시 책 욕심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는 G와의 대화를 한 토막 적지요.

K: 다 채우는데 얼마나 걸릴까.
G: 응?
K: 비워 놓은 서가가 다시 채워지는데 얼마나 걸릴까.
G: 얼마 안 걸리지. 경험상 알잖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