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리쿠, <유지니아>, 비채, 2007


유지니아를 다 읽고 나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책 뒷날개.
근간 목록을 훑어보고는 오한이 들었습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다른 시리즈물을 비롯, 온다 리쿠의 다른 책들까지 목록에 확 올라있는데 스나크 사냥의 후기를 읽을 때보다 한층 더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올 여름은 정말 총알 장전에 장전을 거듭하게 만들더니 내년 초까지도 안심은 무리일겁니다. 게다가 비채에서 낸다고 하는 블랙앤화이트 시리즈가 거의 추리소설계라 취향에 상당히 맞을 것으로 예상되니 그렇습니다. 목록만 봐서는 취향인데 막상 읽고 나서는 손안의책에서 나온 광골의 꿈 시리즈처럼 고이 처분할지도 모릅니다. 이건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지라.
(근간에 오른 시리즈가 만만치 않던데, 비채도 어딘가의 임프린트나 자회사일까요?)

첫 장을 읽는 순간 하도 섞어 읽어서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서는 슬슬 혈압이 올라가면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같은 라인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시리즈가 아니라 비슷한 느낌이라는 의미입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떠올랐던 것이나 <삼월~>이 떠올랐던 것이나 둘다 형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아실겁니다. 지금 보니 <호텔 정원>과도 닮았군요.
앞서 읽었던 <불안한 동화>와는 내용적인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옛날에 일어났던 어느 살인사건에 대해 쫓아가는 것은 불안한 동화와 닮아 있지만 이 이야기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조금 다릅니다. 뒤통수를 때리는 것도 닮았지만 그 아픔은 차이가 있습니다. <불안한 동화>는 때린 즉시 아팠지만 <유지니아>는 맞은 뒤에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굉장히 아프다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대신 <유지니아>가 2005년작, <불안한 동화>는 초기작이라고 하니 불안한 동화보다 훨씬 진화했다고 할까요? 진상은 없습니다.

이 미적지근한 결말을 보고 나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아니, 사실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앞서 깔려 있던 여러 복선들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아, 이래서 여기가 그랬구나라는 식으로. 하지만 불편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다 엔딩의 모호함으로 인해 고이 접어두고는 서가에 꽂아 두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에 대해서는 역자가 따로 언급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조금 아시는 분이라면 금방 눈치채실겁니다. 배경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가 정확해서 실제 무대가 되었던 집이 지금 찾아가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책이 두껍지만 굉장히 여러 챕터로 나뉘어 있어서 중간 중간 끊어 가며 읽어도 좋습니다. 끊어 읽으면서 되새김질을 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읽고 나서 보니 연대표를 작성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면서 다시 읽을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불안한 동화와는 좀 다른 의미로-두 번 손 대고 싶지 않거든요. 제 취향에는 좀더 깔끔하고 쌈박한 것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엊그제 구입한 화차는 소장하고 싶다면서 구입한 것은 변덕 때문인건지, 소설가 취향 차이 때문인 건지.

최근에 대량으로 구입한 미야베-온다 라인 중에서는 이 책을 제일 마지막으로 읽었으니 설렁설렁 평가를 해보지요.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하자면 미야베 미유키가 온다 리쿠보다는 한 수 위입니다. 하지만 온다 리쿠의 몇몇 소설은 계속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럴 예정입니다. 계속 소장하려고 하는 것은 <네버랜드>(대출중), <빛의 제국>(대출중), <여섯 번째 사요코>(대출중),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밤의 피크닉>, <엔드게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보류, 삼월라인 책들도 보류입니다. <흑과 다의 환상>, <보리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녘 백합의 뼈>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민들레 공책>이나 <라이온 하트>도 취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방출, 혹은 장기 대출보낼 생각입니다. <유지니아>도 장기 대출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온다 리쿠 컬렉션에서 빠진 책은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도서실의 바다>, <구형의 계절> 세 권입니다. 하지만 이 세 권을 채우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있는 책도 버거운걸요. 같은 작가 안에서도 취향이 꽤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 안에서의 편식이라, 무라카미 하루키도 수필집만 보고 있으니 그게 그거죠.;; 미야베 미유키도 판타지 소설 계는 손을 안대고 있고.

자아. 슬슬 총알 재충전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조만간 표적들이 뜰 것 같으니 총알을 모아둬야 쏘기라도 하죠. 빚맞든 말든 모아두는 것이 먼저입니다. 돈 생각을 한다면 원서를 사보는게 훨씬 싸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좋아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