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소설의 제목은 쉽게 흘려 읽고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이 큰 영향을 주는, 제목에 내용폭로의 소재가 있는 경우에는 읽는 도중에 뒤통수 맞았다며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힌트가 나와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이니까요.

 

1월의 독서목록에 오른 『베타 테스트 종료』는 감상을 안 남길 수 없었습니다. 와아. 이건 그냥 보통의 BL이 아니었으니까요. 조아라에 연재되었을 당시, 조아라 연재부분은 매우 초반에 해당합니다. 1권 분량 쯤인가, 아니 그보다도 적을지 모릅니다. 그 분량을 넘어, 클라이막스에 달했을 때는 소설의 장르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까지 전까지의 이 소설은, 재벌가의 막내아들인 강해아의 인생 2회차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SF, 에스에프

 

궁서체로 진지하게 적고 싶었지만 영문 폰트는 적용이 되지 않아 한글독음까지 적게 만든, 그런 SF소설입니다. 회귀라는 소재를 써서 판타지소설이었던 장르는 그 장면이 등장한 이후에는 당당히 과학소설이 됩니다. 정말로 마법 같지요!

(젠장)

 

 

주인공은 강해아입니다. 강해아는 2남 2녀의 막내로 오메가 발현율이 높은 베타였지만, 회귀 전까지 발현하지 못합니다. 재벌가 막내였기에 발현가능성을 들고 유망 기업 사장과 결혼하지만, 결혼 후 배우자의 집안에 파문이 일고, 장인(혹은 시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배우자와 사이가 멀어집니다.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작업실로 쓰던 별채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번 생만은, 자신의 전 배우자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결혼을 물러 보려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회귀 전보다 더 성숙한 정신연령 때문인지, 그런 해아에게 전 남편이자 현 약혼자가 될 천태림은 호감을 가진 듯합니다. 해아는 형이 여전히 무섭고, 아버지도 무섭지만 그래도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이전 생에서 아쉬웠던 점들을 하나 하나 고쳐갑니다. 그 와중에 회귀 전의 강해아도 몰랐던 여러가지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그건 천태림의 비서이자 강해아보다도 더 가까웠던 존재인 시은철의 상황도 포함됩니다.

 

라고 쓰면 단순 회귀소개 BL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양파입니다. 강해아가 중심으로 등장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야기가 풀려나가면서 껍질을 벗습니다. 그 속은 매우 지독하게 썩어있고요. 특히 강해아는 썩은 양파들에 둘러 싸여 있다보니 덩달아 물러버린 양파입니다. .. 양파 참 맛있고 건강에 좋고 좋은데, 썩은 양파는 냄새가 지독합니다. 해아는 그 지독한 냄새마저도 삶의 일부였기에 자각이 없습니다. 해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냄새 나니까 물러나' 정도였다면, 태림은 그 양파를 멀리 치워줍니다. 더 나아가, 양파가 썩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기도 하지요. 그 방법은 매우 동의하지 않지만, 에필로그를 보고는 약간은 내려 놓았습니다.

 

이하는 내용폭로이니 짧은 문장이나마 접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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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저는 AI도 인격이나 그와 유사하고 또 동등한 격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가질 수 있다가 아니라 가진다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그 장면. 천태림의 자각 혹은 각성이라 부를 그 장면이었습니다. 상자 속의 고양이가, 밖에서 슈뢰딩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느낌이었지요. 굳이 표현하면 이거.

 

 

아, 거꾸로인가. 하여간.

 

 

읽는 도중 그 예의 SF자각장면을 읽을 때 떠올렸던 건 QED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습니다. 요셉의 사다리 이야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아마 초반권이었을 겁니다. 전자책을 다시 산다면 문제 없을 테긴 한데, 그걸 하려면 전자잉크를 지원하는 컬러 패널의 전자책 전용 태블릿을 구입해야하고요. 하여간 그 편의 이야기가 떠올랐던 건,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거 말고는 MGH?

 

 

그랬기 때문에 다른 소설에 걸렸던 유사성 의혹은 『베타 테스트 종료』를 다 읽고 났을 때 "왜?"라는 답과 함께 해소되었습니다. 키워드는 같습니다. 재벌가의 정략결혼과 불행한 결혼, 그 부부 중 한 명의 회귀와 다른 노선. 그런 점은 같지만 풀어내는 방식이 다릅니다. 『베타 테스트 종료』의 초점은 상자에 있다고 봅니다. 외전의 내용이 상자 밖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테고요. 그리고 다른 소설의 초점은, 구원과 성장에 있습니다. 해아나 태림도 성장하고 구원합니다. 하지만 그 절실함은 조금 다르다고 봅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어가느냐의 문제이고, 『베타 테스트 종료』는, 그 본편의 이야기는 상자를 뚫고 나갈 정도의 절박함과 절실함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하게, 이전 생보다 조금 더 능숙하고 조금 더 잘 할 수 있게, 칭찬을 들을 수 있게-라는 해아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 상자 밖으로 편지를 던지는 이야기.

그리고 그게 SF인겁니다.

 

 

김아소. 『베타 테스트 종료 1~4, 외전』. 시크노블, 2020, 세트 17600원.

 

원래도 내용폭로를 가능한 줄이기 위해 은유적 표현과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듬뿍 집어 넣지만, 이번은 정말, 설명하는 순간 제가 느꼈던 충격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알쏭달쏭한 상태로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그 부분을 읽고 나면 제목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새삼 빡침.-ㅁ-+

 

가정폭력 트라우마가 있으시다면 그리 추천하지 않습니다. 회귀 전의 강해아와 천태림이 엇갈린 이유 중에는 폭력 관련 내용이 있으니까요.

 

 

 

덧붙임.

수위가 조오금 높습니다. 아니, 뭐. 김아소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수위가 높으니까요.'ㅂ'a 그리고 외전은 달달하면서도 간절하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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