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조금 흥미가 돌아 펼쳤다가, 그대로 집어 들었습니다. 제목 자체가 매우 취향이 아니라 원래는 안 볼 책이었지만, 출판사가 문학동네더군요.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런 제목의 책이라면 보통의 책일리 없다며 집어 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읽는 내내 포복절도하며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에 홀리지 말라는 겁니다. 제목에 홀려 책을 멀리하지 마시고, 일단 읽으세요.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4165729
원제는 『紅一点論』입니다. 서문에서 설명하는데, 홍일점은 왕안석의 시, 萬綠叢中紅一点에서 왔답니다. 원래 의미는 군계일학(群鷄一鶴)과 비슷하다는군요. 모두가 푸르른 가운데 홀로 붉다는 건 특별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를 일컫는 단어였지만, 지금은 '남성 무리 중 여성 하나'를 두고 홍일점이라 부릅니다. 청일점이란 단어도 파생되었지요.
이 책은 애니메이션 속의 홍일점, 여러 '소년 애니메이션 속 소년왕국'과 '소녀 애니메이션 속 소녀왕국'에서 여성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그 때까지의 여러 애니메이션을 인용분석했습니다.
그 기준이 1998년이다보니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읽는 독자인 저는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 중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지지하는 쪽이라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이고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 시니컬하면서 촌철살인 같은 유머가 난무합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포스트잇 꺼내 태그 붙여 가면서 읽었습니다. 책은 얇지 않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매우 즐겁게 보았던 부분만 체크.
p.27
말하자면 우리의 소년 왕국 팀은 거대 관료기구의 말단 조직에 불과한 것이다.
가끔은 특별 조직이라고 포장하지만 그래봤자 말단입니다. 특수임무 맡았다고 해도 결정권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p.29
무기 개발하는 이들이 어용학자라고 퍽 찌르셨지요. 저는 그 사람들에게 반해서 과학자를 한 때 꿈꾸었던 학도입니다. 과학자는 아니고, 그래도 박사 소리를 듣고 싶다며 대학원에 들어가... (하략)
그렇습니다. 제 가방끈이 조금 길어진 이유는 모두가 소년 애니메이션의 탓입니다.
p.34
소년 왕국은 보통 지구 전체나 태양계, 은하, 우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소녀 왕국은 작은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스케일이 작은게 아니라, 아예 없다는군요. 아니,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카드캡터 체리』도 일단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고 다국적이지만 놀러 나가기 전까지는 일단 마을이 배경입니다. 그 안에서만 놀아요. 비슷한 채집형(..) 이야기인 포켓몬은 또 다르지요.
소녀 왕국에서는 아인슈타인이나 뉴턴이나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가 안나왔다-하지만 소년 왕국은 박사급 연구자가 항상 끼어 있습니다. 뉴턴이 등장하는 모 애니를 잠시 떠올리며 그, 거기에는 나왔-다고 이야기 하려다 보니 그거 여주인공이 유명해서 그렇지 소년 왕국이었지요. 선라이즈 제작이잖아요.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대부분을 알기 때문에 이해는 쉬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떤 느낌일까, 조금 궁금합니다.
p.48
잡지명이 '기네마 준포'라는데, 혹시 키네마 준포였을까요. Cinema를 키네마로 읽은 걸, 일본어 표기에 맞춰 기네마로 바꾸지 않았나란 의심이 듭니다만.
훌쩍 건너뛰어, p.171.
기준이 애니메이션이다보니, 세일러 문도 알고 있는 부분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 턱시도 가면 말이지요. 애니에서는 대학생과 중학생이지만 원작 만화에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입니다. R까지는 중학생이던가요. 하여간 금방 고등학교 진학하고 ... ... .. (하략)
중간에 지적했던 대로, 소녀 왕국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적에게 세뇌 당해 여자 주인공을 공격하는 장면이 한 번쯤은 나옵니다. 웨딩피치나 세일러문도 그랬지요.
지금이야 그렇게 세뇌 당한 남자 주인공을 둘둘 멍석말이 해다가 흠씬 주물러 줘야 하지 않나 싶네요. 대개는 그런 장면에서 눈물로 호소하여 세뇌를 깨는데, 눈물이 최고의 무기라고 했던 앞부분의 설명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소년 왕국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오나요? 나오더라도 로미오-줄리엣이 아니라 호동-낙랑처럼 적군인 여성캐릭터는 눈물과 함께 산화하지요. 인어공주도 아니고 참. 그러고 보니 그랜라간에도 그런 장면 있지 않았나.
p.191
건담의 화이트베이스를 전공투로 비유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전공투 이야기를 읽었지요.
https://twitter.com/inlemidnight/status/1330795748108115968?s=20
이 타래.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덕질의 고향은 하나가 아니니, 축 하나는 『꿈속의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백작 카인』이며, 다른 쪽은 CLAMP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소녀혁명 우테나』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 우테나를 애니메이션으로 본 적 없습니다. 텍스트, 분석글을 보았을따름이지요. 하지만 LD 세트는 있다.-ㅁ- .. 아차. 이번에 가면 우테나 LD 세트를 들고 와야겠네요.
하여간 건담의 분석글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아무로 레이를 둘러싼 여러 여성 중, 라라에 대한 설명은 진짜. p.200에서 대놓고 이야기 합니다. 마틸다 중위는 ***의 커리어우먼이고, 라라는 ** **이라고요. 근데 ** **은 좀 심하고, 샤아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뭐랄까.-_- 베르테르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닐까 싶고요?
p.204
에반게리온 분석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이건 98년의 TV판 에바입니다. 신극장판의 에바는 또 다르니까요. 그리고 만화판의 에바도 그렇고. 신판의 에바를 분석한 버전도 참으로 듣고 싶고요.
저는 에바 신극만 제대로 보았고, 내용만 대강 압니다. DVD는 TV 리마스터링 판으로 갖고 있지만 신극장판을 보고 나니 볼 엄두가 안나더군요. 신극장판의 신지는 반짝반짝하니 참 예쁜데, TV판은 조금 약합니다. 정확히는, 신극장판의 신지는 1.5회차 플레이를 하는 느낌입니다. 하하하.;
p.212
걸레만 짜면 다 엄마냐
(마구 웃고있다)
p.214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든 악의 근원은 이카리 겐도
(마구 웃고있다)(2)
진짜 그렇습니다. 제레가 아니라 이카리 겐도가 문제예요.
에바 다음에는 나우시카가 등장합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위에 올라왔던 모 트위터리안의 타래에서도 보았으니 슬쩍 넘어가고요. 나우시카뿐만 아니라 원령공주를 포함해 여러 지브리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특히 원령공주의 모 남정네에 대한 평가도 매우 웃겼지요. 두 여성의 대립을 중재하는 인물이 이 남정네고, 동시에 양쪽에서 프로포즈(!) 비슷한 것을 받는다고.
마지막 장은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헬렌 켈러나 마리 퀴리, 나이팅게일 등이 등장하는데, 맨 마지막에 나오는 헬렌 켈러는 그 실제 성격 등이 덜 등장하여 아쉽네요. 듣기로는 사회주의자라던가, 설리반 선생님과의 관계라든가 등등. 헬렌 켈러가 주인공인 '기적의 사람'은 사실 영화나 연극이 아니라 유리가면에서 먼저 보았습니다. 마야가 아유미를 이겼던 건 중 하나가 헬렌 켈러 역이었지요.
위인들의 분석은 일본에 나온 위인전 중심이다보니 실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덜 나와 아쉽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나, 통계학과 행정처리전문가였다는 점, 그리고 마리 퀴리의 업적이나 헬렌 켈레의 다른 모습도 소개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거기까지 본격적으로 다루기엔 지면이 부족합니다.
사이토 미나코(2020). 요술봉과 분홍 제복, 권서경 옮김. 파주: 문학동네. 원서는 1998년 출간.
하여간 이 책은 아주 즐겁게 보았으니, 다른 분들도 웃으면서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꼭 읽어보세요.+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