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왜 『팁시 레이디』인지 말미에는 나오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다가, 지금 리뷰 쓰면서 확인했습니다. 아니군요. 초반부터 아예 제목을 대놓고 말합니다.
tipsy
1.취해서 비틀거리는 2.거나하게 취한 3.기우뚱한
소설 첫머리에서, 주인공인 주소영은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되짚습니다. 기획한 과일소주가 대성공하여 그 기념 회식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들고 나오다가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이기 직전의 아이를 감싼 일까지는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 처한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합니다.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소영은 판타지소설의 세계에 환생했습니다.
귀족집안 중에서도 대귀족이라 할 수 있는 올드 블러드는, 어떤 의미로는 푸른 피의 다른 모습입니다. 차이라면 능력이겠네요. 옌 제국의 시조는 빙룡의 화신이었고 빙룡의 몸에서 만든 두 마녀를 거느려 제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올드 블러드와 빙룡의 화신은 제국의 중심축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가지요. 니케아란 이름을 받은 소영은 이 올드 블러드의 피를 이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엘던의 가주, 어머니는 바이던의 후계자이며 니케아는 바이던의 형질을 이어받아 또 다른 후계자가 됩니다.
원래 세계에서 매우 주당이던 니케아는 금주령이 내려졌다는 새로운 세계에 절망합니다. 추위 때문에라도 술이 생필품인 북쪽 땅은 그 때문에 더더욱 힘듭니다. 아이여서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금주령 때문에 좋은 술을 마시기 어렵습니다. 브랜디와 위스키를 생산하던 북쪽의 증류소들은 폐쇄된지 오래거든요. 거기에 팔자 좋게 유유자적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옌 제국은 야만인들이 세운 나라이며, 남성은 무력을 닦아 열심히 싸우고 여성들은 행정과 실무를 맡아 집안을 이끕니다. 니케아의 어머니인 아일라 바이던은 아이를 낳은 뒤 몸이 좋지 않아 남쪽 탑에서 두문불출하고, 영지를 관리하는 모든 종류의 업무는 다 니케아에게 넘어옵니다. 아버지와 이복 오라버니들은 북쪽 저 멀리에서 오는 몬스터 처치 담당입니다.
바이던의 후계이지만 엘던의 딸이기도 하니 니케아의 업무는 절대 줄 일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케아는 강원도지사쯤의 업무를 소화합니다. 엘던의 모든 행정업무에, 가문의 상단을 운영하고, 가문의 영지에 출입하는 여러 상단들과 가격을 조정하는 등의 모든 관리 업무가 니케아의 몫입니다. 서류는 쌓이고, 사랑하는 술은 만나기 어렵고, 그 와중에 자신의 생일파티 겸 겨울 축제가 머지 않았습니다. 몰려오는 업무에 폭주한 니케아는 사고를 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행사를 앞에 두고 들어온 지하창고의 포도주가 발단입니다.
6권까지 거의 쉬지 않고 달리다보니 매우 유쾌합니다. 이야기는 엘던의 영지에서 시작해, 금주법과 올드 블러드, 황제 그리고 황위 계승 문제와 제국의 존속문제까지 깊게 이어집니다. 다만 그 얼개들이 매우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요. 단순한 여주인공의 승리담이 아니라, 앞에 깔아 놓았던 여러 복선들이 맨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태피스트리를 짜 올리면서 맨 아래에 사용되었던 실이 다시 한 번 마무리할 때도 등장하는 것에 가깝겠네요. 짜일 때는 몰랐지만 짜고 보니 전체 이야기의 여러 소재들은 다 각각이 필요했고 또 등장해야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하나 허투루 놓칠 수 없습니다.
그간 니케아는 성장하지만 그건 뒷전의 이야기고, 가장 좋은 것은 각 장마다 등장하는 술입니다. 앞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저는 술을 즐기진 않습니다. 맥주까지가 한계라니까요. 독한 술은 술 특유의 그 맛, 혀와 목구멍을 자극하는 느낌이 좋지 않아 슬며시 피합니다. 그러나 니케아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술은 매우 좋고, 저 술은 매우 맛있어 보이며 나도 한 잔 주소.......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안돼, 이러면 안돼....!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주당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포도주로 끝나며, 수 많은 증류주와 리큐르, 과일주와 맥주는 사람을 홀립니다. 냉장고에서 자고 있는 맥주 한 캔이라도 꺼내야 속이 풀릴 정도로요.
... 안되겠네요. 쓰다보니 술이 고픕니다. 점심 때 맥주 한 캔 곁들여야 겠어요.
남유현. 『팁시 레이디 1-6』(세트). 로즈엔, 2019, 세트 20000원.
1.이 소설이 추천받은 건 술 때문이 아니라 여성서사 때문입니다. 니케아가 엘던이 아니라 바이던을 이어 받는 것은 형질 때문이고, 올드 블러드의 가주들은 여성이 많습니다. 옌 제국은 남자들이 나가서 싸우다보니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영역은 여성이 맡습니다. 거기에는 행정직과 상단 등의 모든 사회활동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반동인물의 존재가 또 매력적이고요. 등장인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커플을 뽑으라면 역시 쥬느비에브 커플입니다. 이 부부 정말 좋아요...!
그리고 여성서사건 아니건,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즐겁게 읽은 판타지소설이라니까요.
2.덧붙여. 재상님. 미리 명복을 빌어 드립니다. 초반의 묘사와 후반의 묘사, 그리고 스트레스 받는 걸 생각하면 오래 못사실 겁니다. 최소 위암, 아니면 뇌출혈을 포함한 순환계의 문제가........ (먼산)
3.아니, 다른 등장인물도 다들 좋지만 가장 좋은 캐릭터는 역시 저 부부입니다. 주인공들과 다른 인물이 언급 덜 된다 해도 그렇고요. 또 니나 같은 타입의 보좌도 제 취향입니다. 로맨스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일은 잘하지만 수다쟁이'라거나 '일은 서툴지만 마음은 따뜻한' 메이드는 사양입니다. 저는 프로페셔널한 시중인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