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요약: 읽으세요!
종종 제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로맨스가 전무한 로맨스판타지소설의 이야기가 올라옵니다. 뭐냐하면, 로맨스만 있었을 당시 여러 요청에 따라 로맨스판타지를 별도 범주(카테고리)로 분리했더니, 이제는 주인공이 여자이면 무조건 로맨스 판타지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작가가 여성일 경우에도 높은 확률로 로맨스판타지가 된다고요. 그래서 로맨스가 손톱만큼도 없는 소설들이 로맨스 판타지로 분류되고, 심지어 그 때문에 소설 평점이 '로맨스 판타지에 로맨스가 없다'는 이유로 깎인다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요. 그런 대표적인 작품으로 언급되는 것이 『에이미의 우울』입니다. 주인공인 에이미에게는 연애가 전혀 없지만 주변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장대한 로맨스 서사시를 써내릴 정도로 연애를 합니다. 에이미의 어머니가 그렇고, 에이미 이복아버지의 전처의 딸이 그렇고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감상기에 적었으니 여기서는 접어둡니다. 하여간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느냐, 지금 소개하는 소설도 로맨스가 전혀 없는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오랜만에 홍대 북새통 문고에 가서 책을 사고, 여기저기 얼쩡거리며 확인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서가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당황합니다. 저자가 여왕이래요. 제가 아는 그 작가가 맞다면 이 책은 무조건 사야합니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결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3월 둘째 주 금요일이었고, 그 날 알라딘 사태가 터졌습니다. 받아 놓은 책도 뜯기 싫어 잠시 방치했다가 뒤늦게 읽고는 힐링했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했지요. 그냥 북새통에서 사올걸 그랬다고 말입니다.
다 읽고 나니 매우 흡족합니다. 다만 책 뒷면의 소개글은 일종의 함정입니다. 매우 느낌이 달라요. 초반에는 평범한 일상에 이상한 인물이 끼어들어왔다 쯤인데, 그 다음에는 무인도에 떨어져서 한참 자급자족생활을 합니다. 물론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을 지내온 사람만은 아니니까 그 섬을 탈출합니다. ... 아니, 정말로.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 일반인의 무인도 표류기 정석은 옛날 옛적에 읽은 모 BL인데, 그쪽은 아주 현실적이지요. 주인공인 유정이 혼자 식량을 모으고 배를 타고 탈출해서 저 멀리 있는 다른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건 이 섬이 열대 지방에 가깝게 아주 큰 추위는 없는 곳이어서 그렇습니다. 뭐, 신의 가호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이 아니니까 가능했지요. 그러고는 잠시 정착해서 일을 하다가, 또 다른 일에 휘말려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래서 챕터마다 분위기가 휙휙 바뀝니다. 유정의 직업이 요리사라는 건 초반에 소개되었지만, 보통의 요리사가 아니라 온갖 것을 다 자급자족 생산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지식도 있고, 기술도 있습니다. 거기에 체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고요. 그러니 처음에는 니모를 길들이고, 그 다음에는 이세계의 무인도에 떨어져 혼자 살아 남고, 그 다음에는 혼자 섬을 탈출했다가 구출되며, 거기서 직업 얻을 길을 엽니다. 이세계의 다른 이들을 만나고서 알았지만 여기는 판타지세계가 맞고, 무엇보다 식문화가 매우 뒤떨어진 세계입니다. 유정은 혼자 이 세계에 식생활 혁명을 일으키고요. 물론 혼자서만 하지는 않습니다. 뒤로 가면 갈 수록 판은 커집니다.
식문화 혁명이라는 점에서 이런 저런 다른 소설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플레누스』가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결이 다릅니다. 플레누스는 신이 직접 다른 차원의 영혼을 환생시킨 뒤 신물을 통해 식생활 혁명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식생활을 넘어 문화와 공학기술 전반에도 엄청난 혁명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신의 힘을 업었다고는 하나, 혼자서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동시에 일으킨 셈이지요. 『구원자의 요리법』은 조금 다릅니다. 식문화 혁명은 두 번째 일이고,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기입니다. 믿고서 따라온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져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구조는 요코와 케이키(『십이국기』)와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유정은 요코와는 달리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고등학생과 김병만 정도로 비교할 수 있네요. 아니, 정말로. 요코는 일반 고등학생이었지만 유정은 <정글의 법칙>에 나오는 족장님 못지 않습니다. 나무베고 여러 재료를 구해 움막을 짓고, 진흙을 떠다 구들 있는 집을 4일 만에 완성합니다. 항아리도 여럿 빚어 그 속에 젓갈을 담고, 나중에는 조청까지 만들어 냅니다. 식초를 만들기 위해 알코올 제조부터 시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에요. 그리고 그런 힘은 초반뿐만 아니라 뒤로 가면 더더욱 빛이 납니다. 희한하게도 앞이 아니라 뒤에서 빛이 납니다.
연 하나 없던 유정은 결국 이세계에 정착합니다. 내용폭로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읽다보면 안가겠다 싶지요. 여기가 이렇게 좋은 공간이 있고 좋은 능력이 생겼는데 왜 가나요. 그냥 눌러 앉아도 문제 없고, 나중에는 아주 대단한 후견인도 생깁니다. 그러니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이 살아가는 이 곳을 선택하는 것도 당연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어디 발 붙이고 마음 붙일 곳 없던 인물이 자신의 힘으로 길을 쌓아 올려 결국에는 원하던 것을 이뤄내는 길을 그려냈는지 모릅니다. 다 읽고 나면 배도 고프지만 괜히 더 흐뭇하네요. 마지막의 후일담까지 읽으면 그렇습니다.
여성이 주인공이고 남성도 존재하나 로맨스는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여러 기회와 모험뿐입니다. 판타지세계 속에서 역경을 헤쳐 나가 세계를 구하는(농담 아님) 주인공이 보고 싶으시다면 꼭 읽으세요. 다만, 배부를 때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배고프시다면 매우, 큰 고통을 겪으실 겁니다.
여왕. 『구원자의 요리법』. 필프리미엄에디션(뿔미디어), 2019, 14000원.
다 읽고 나니 엉뚱하게 『패스파인더』가 떠오릅니다. 저는 도중에 포기하고 내려왔지만, 이 분 쓰신 다른 글들도 굉장히 매력적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