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출간년도가 2000년임을 감안해도, 이 의견 난 반댈세. 그러나, 반대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




이 책의 부제는 "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이며, 의학박사로 사회정신보건학 교수인 사이토 타마키라는 사람이 쓴 서브컬처 분석서입니다. 이 책이 등장할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책 날개를 보면 전공이 라캉 정신분석이고 히키코모리의 치료와 지원 및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분석도 그쪽 방향입니다. 전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과는 담을 쌓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읽으면서도 무슨 소리인가 한참 헤맸습니다. 이해 안가는 부분은 건너 뛰었지만 대체적으로 이 책의 논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답.정.너. 답은 내가 정해두었으니 오타쿠 너희들은 대답해.


읽으면서 이건 인문학적 연구방법인가, 사회과학적 연구방법론에서는 가설을 세우고 그에 맞춰 이것저것 증거를 끼워 맞춰 그럴싸하게 만드는 것인데, 여기서도 그러하지만 그 증거란게 선택적으로 작용하다보니 그 바닥 사람들로서는 이거 뭐야라고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이야기더랍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장은 '오타쿠'의 정신병리, 2장은 '오타쿠'의 편지, 3장은 해외의 전투미소녀들, 4장은 헨리 다거의 기묘한 왕국, 5장은 전투 미소녀의 계보, 6장은 펠릭 걸즈가 생성되다입니다.


저자는 1장에서 오타쿠의 정신병리에 대해 라캉을 비롯한 여러 정신분석학의 기조를 통해 분석하고, 이를 2장의 오타쿠의 편지를 통해 뒷받침하고 재확인 합니다. 3장은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의 전투미소녀들이 어떠한 계보를 가지는지 기술하며, 그에 앞서 외국의 여러 연구자들이나 외국의 오타쿠들에게 메일로 문의하여 여러 답을 얻어 펼쳐 놓습니다. 4장은 서장에도 언급된 미국인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헨리 다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전투 미소녀 계보를 펼치고 그걸 13가지의 범주로 나누며, 6장에서는 성도착 분석에서 사용하는 펠릭 머더를 소녀로 치환하여 전투 미소녀를 펠릭 걸로 지칭합니다.


... 만. 아니, 왜 싸우는 미소녀가 펠릭 걸이 되어야 하는 건데-라는 태클부터 걸고 싶어집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나는 미국의 아웃사이더 아티스트인 헨리 다거의 그림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고 이를 오타쿠의 분석에 도입하고자 한다. 오타쿠는 2차원적 인물을 상대로 '뽑아낼 수 있는'이들이며, 이는 허구성에 몰입하고 '모에'하는데서 근거한다. 일본 아니메에서 전투 미소녀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총 13가지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팰릭 걸즈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팰릭 걸즈는 오타쿠들에게 섹슈얼리티를 포함한 모든 환상을 모아 놓은 이콘이다."쯤 됩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팰릭 걸은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할 정도로 복잡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1.팰릭 마더는 페니스를 가진 어머니란 단어의 의미 그대로, 슈퍼우먼, 알파우먼적인 어머니를 가리킴. 원래 정신분석의 성도착에서 사용되는 용어. 또한 권위적인 어머니라는 뜻도 있음.


2.고타니 마리는 팰릭 마더에게 어떤 상처-강간과 같은-가 있는 것이 아닌가란 의견을 제시했고,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팰릭 걸은 거꾸로 트라우마가 없는 존재라고 말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빗대면 '오움에게 강간당해' 상처가 있는 크사나와는 달리, 팰릭 걸=전투미소녀에 해당하는 나우시카는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였다는 것.(pp.321-322)


3.팰릭 마더는 강간과 같은 외상성을 근거로 싸우지만 팰릭 걸에게는 그런 것이 없음.이는 공허함이라고 볼 수도 있음. 팰릭 마더가 페니스를 가진 여성이라면 팰릭 걸은 페니스와 동일화된 소녀임.(pp.323-324)


...

저는 여기서 더 요약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저랑은 보는 시선이 너무도 다릅니다. 정신분석학 쪽의 책은 읽어도 기억에서 휘발되었거나 아니면 이번 책이 처음이라 그런 걸까요. 서로 다르고 배경도 그 출신도, 설정도 다른 이들을 한데 묶어서 팰릭 걸로 요약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해 못한다고 보기에는 여기도 이상하고 저기도 이상합니다.



앞서 답정너라고 한 것도 이 책 전체가 이 마지막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증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저, 팰릭 걸에의 공허함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봅니다. 전투미소녀들은 완성되어 있고, 상처가 없다, 그러니 싸우는 이유 자체가 공허하다.

...

이거 전투 미소녀 말고 전투 편대가 등장하는 모든 소설에 들이 대볼까요? 남녀가 뒤섞인 전투청년 전투청소년은 남녀가 유별하게 움직입니까? 아니, 아야나미 레이의 공허함은 외상성 그 자체가 아닌가요. 싸우는 동력 없이 초반에는 그저 명령이니까 움직였지만 점차 소년에게 감화되어 자신의 동력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아야나미 레이의 진가 아닙니까. 애초에 에바에는 이 장치 자체가 작용하지 않습니다. 세일러문을 포함한 여러 전투 미소녀들도 자기 나름의 이유와 근거로 싸우고 있는 거라고요. 그게 팰릭 마더와 구분되는 팰릭 걸을 만들 정도로 강렬한 건 아닙니다.


저자의 논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로 소개되는 저 헨리 다거 때문이기도 합니다. 5~7세 사이의 소녀들이 누군가와 격렬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이 사람은 죽기 직전에야 그 작품들이 공개됩니다. 책에 실린 그 일부 그림을 보고 맨 처음 떠올린 건 페니스가 있는 소녀가 아니라 오토코노코였습니다.(...) 5~7세의 소녀들이다보니 유아체형이고, 그렇다보니 2차성징 전입니다. 그냥 놓고 보면 말만 여자고 이름만 여자지 요즘의 그 오토코노코가 바로 떠오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양성구유요. 그리고 그 작품 자체가 보고 있노라면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라는 건 근사하게 붙여 놓은 것이고 사실상 저 사람은, "어쩌다보니 죽기 전에 폐기하려고 했던 소아성애형 동인지를, 예술계 교수인 집주인이 "OH IT'S GREAT!"라고 외치며 박제하여 죽을 때까지 이불 속에서 하이킥하고 있었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헨리 다거를 다룬 4장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래. 가장 혈압 올랐던 건 일본 전투 미소녀의 계보입니다. 계보 짚어 나가는 것은 어릴 적 모종의 경로로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계보를 복습하는 느낌인데, 분석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pp.250-251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다카라즈카 계열 문제작 <소녀혁명 우테나>에는 결투의 승자에게 '상품'으로 주어지는 소녀 '히메미야 안시'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그보다 앞에서 인공 미소녀 아야나미 레이, 기동전함 나데시코의 호시노 누리와 같은 계열로 '다카라즈카 계열'의 애니메이션인 『소녀혁명 우테나』의 히메미야 안시를 드는 겁니다.

...

PARDON?

저기. 안시가 쿨하고 공허하고 표정없는 타입의 여성이라고요? 우테나가 다카라즈카 계열이라고요? 우테나가 남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애니메이션 분류표를 잠시 보죠. 전투 미소녀의 계보를 13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홍일점 계열

2.마법소녀 계열

3.변신소녀 계열

4.팀 계열

5.스포츠 근성 계열

6.다카라 즈카 계열(복장 도착 계열에 포함)

7.복장 도착 계열

8.헌터 계열

9.동거 계열

10.피그 말리온 계열

11.무녀 계열

12.이세계 계열

13.혼합 계열


참고로. 저 계열의 띄어쓰기는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첨언하자면 스포츠 근성 계열에 들어가는 1996년의 OVA는 <대운동>으로 소개되었군요. 이거 TV판은 그 뒤였나?


날이 추우니 저혈압인 분들을 위해 따끈하게 데워드리겠습니다. 각 계열에서,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은 것만 추가로 적어봅니다. 단, 이 책이 2000년 출간이니 그 이전작 기준으로 소개됩니다.



거기에, 만화 일부와 아니메를 중심으로 소개하다보니 전투 미소녀에 게임이 많지 않습니다. 무녀 계에 레이나가 빠진 것도 그렇고, 파판의 여러 주인공과 나코루루를 비롯하여, 작가의 기준대로라면 "뽑아낼만한" 인물들도 다수 빠졌군요. 오타쿠는 대체적으로 혼합형이고, 게임은 하지 않아도 코미케 등의 2차 창작 등을 통해 게임 캐릭터도 다수 인기를 얻으니 그쪽 분석이 적은 것도 걸립니다.

뭐라해도 저런 분류는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근거를 갖고 해야하나 그 근거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등장인물 중 누구를 전투미소녀로 볼 것인지, 전투미소녀가 여럿인 경우에는 누구에 집중을 해야하는지, 저기에서 언급한 범주명이 옳다고 보는지, 지적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외에도 읽으면서 태깅한 곳이 여럿 남아 있어 확인하니,


1.2차창작이라는 SS(Short story / Side story)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진정 오타쿠가 작품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나 다름없으며, 작품에 스스로가 빙의되어 동일한 소재에서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동체에 발표하는 것은 오타쿠 공동체에서 이뤄지는 '소유의 의식'이 아닐까라는군요.(p.42)


2.

(p.57) 오타쿠 사정에 밝은 젊은 친구에 따르면 '디즈티 오타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가끔씩 그러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오타쿠 문제의 본질은 섹슈얼리티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하략)


하기야 저자는 오타쿠와 매니아를 다르게 보고, 오타쿠를 '뽑아내는' 사람으로 지칭했으니까요. 디즈니는 2차 창작에도 매우 민감하고..? 마블이나 DC계 오타쿠는 어떨까 싶습니다만. 게이가 아님에도 남성캐릭터를 좋아하는 오타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건가요? 아니면 '뽑아내지 않으면 오타쿠가 아니다'? 아니면 마블이나 디즈니나 DC계는 오타쿠가 아니다?



3.

pp.58-59

오타쿠에 대한 소박한 혐오의 시선은 그들의 섹슈얼리티에서 극단에 이를 것이다. 남성 오타쿠라면 '로리콘'의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여성 오타쿠의 경우 '야오이', '쇼타콘' 등의 도착증 그룹을 무시할 수 없다.


(먼산)



4.

p.60

(중략) 그리고 오타쿠는 큰 가슴 같은 장르에 관용적이다. 가끔씩은 캐릭터 우상화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이러한 동인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는 팬도 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렇게 '흔한' 팬은 그다지 '오타쿠'로 보이지 않는다.(하략)


여기도 그렇고, 다른 곳도 그렇지만, 이 책이 나올 당시는 그랬는가 싶습니다. 지금의 저나 제 주변인을 보아도 각인 각색 각양 각색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큰 가슴보다 작은 가슴을 선호하고 큰 가슴은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 그 다음 단계지만 취향은 존중하는 파입니다.



5. pp.61~63.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말입니다. 아.. 옮겨 적을 분량이 많기도 해서 일독하시길 권합니다.



6. p.112
세일러복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세일러 복 자체가 수병의 작업복을 여성의 제복으로 바꾼 것이고, 그걸 복장도착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전에 트위터 타래로 본적이 있어서 확인해보니.(링크) 여성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도입했다는군요. 하카마 같은 전통복장보다 훨씬 활동적이니까요. 수병 작업복을 들고 온 이유가 오히려 그쪽인 겁니다.


7. p.315


(중략) 런던 대학 브루나이 갤러리의 타이먼 스크리치에 따르면 에도시대에 대량으로 그려져 유통되었던 춘화는 서민의 자위를 위해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만화, 아니메의 뿌리로 본다는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아니메 그림을 춘화랑 같은 맥락으로 놓고 보는 건 좀...? (한숨)


8. p.361

저자 후기에서, 저자는 "오타쿠 비판이 아니라 오타쿠 옹호의 입장에서 썼다."고 합니다. 발상의 시작은 1994년, 최초 출간은 2000년.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반론은 해설에서도 아주 짧게지만 언급됩니다. 아마 그 이후에 신서 분량의 토론이 나온 모양이고요.



사이토 타마키.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싸우는 소녀'들은 어떻게 등장했나』, 이정민, 최다연 옮김. 에디투스, 2018, 17000원.



읽고 나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서, 다시 또 읽고 구석구석 씹어가며 이건 아니라고 외칠 겁니다.





왼쪽이 한국판 표지, 오른쪽이 일본판, 정확히는 문고판 표지입니다. 저자후기를 보면 00년에 출간할 때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디자인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른편은 06년에 나온 문고판이니 일반판과 표지가 같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해설자가 아주 친절하게 이 책에 대한 비판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오타쿠의 정의에 섹슈얼리티가 들어가야 하느냐라는 부분이라고. 자신은 부정한다고. 저 역시 부정합니다. 매니아와 오타쿠는 현재로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며 양쪽에 걸쳐 있는 이들도 많고, 섹슈얼리티를 완전히 걷어낸 오타쿠들도 존재합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고요. 00년에도 신나게 놀던 분들이 제 탐라에 넘쳐나니까.


그럼에도 오타쿠의 정의에서 가상과 현실을 함께 즐기고 허구성에 빠져들 수 있으며, 허구적 세계와 현실의 활동을 분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건 재미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오타쿠만의 정의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일본 아니메 같은 서브 컬처에서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소설 분야에도 그런 모습이 매우 많이 등장하며 역사도 유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성인뿐만이 아닙니다. 2차성징이 지나지 않은 청소년도 가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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