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비슷한 제목을 어딘가에 달았던 기억이 있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모 라노베 감상 적으면서 달았던 제목인지도 모르지요.

BL, 그리고 가이드버스입니다. 센티넬 대신 에스퍼를 씁니다. 현대보다는 근미래 SF에 가까우며, 전체적으로도 SF입니다. 특히 몇몇 코드는 더더욱 그렇고요. 어떤 코드인지 미리 이야기하면 내용폭로가 되니 입 다뭅니다.



『모형정원』의 주인공은 서림과 도연입니다. 2년 전의 사건 이후 만난 적이 없던 두 사람은, 도연이 살고 있는 곳에 서림이 찾아오면서 재회합니다. 나중에 몇 번 등장하지만 만약 그 사건 직후 재회했다면 도연은 서림을 총으로 쐈을 거라는군요.


사람이라고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그나마 태양열 전지판과 물탱크로 그럭저럭 자급자족이 가능한 집에서 홀로 지내는 도연은 마수의 공격으로 망가진 집을 수리하고 혼자서 덤덤하게 살아나갑니다. 이런 걸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움직이다보니 아주 못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비상식량과 정수한 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집을 수리하고, 또 필요한 물건들을 얻으러 돌아다니는 것은 무인도에 떨어져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인류가 멸망한 것은 레벨 10의 에스퍼인 이강우가 게이트 앞에서 폭주하는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수들이 건너오는 문이었던 게이트는, 이강우의 폭주를 통해 이상 반응을 보이며 엄청난 크기로 확장되었고, 곧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들어왔습니다. 에스퍼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었던 마수들 때문에 인류는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가이드들은 마수의 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앙 앞에 가이드건 뭐건 의미가 있나요. 아귀다툼과 에스퍼만이 해치울 수 있는 강력한 마수의 습격 속에서 인류는 절멸에 가까운 길을 걷습니다.



도연이 홀로 지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윤서림의 방문과 함께 과거의 이야기도 함께 진행됩니다. 도연이 왜 서림을 총으로 쏘려고 했는지, 도연이 왜 서림을 밀어내는지, 그리고 서림은 왜 도연을 이제야 찾아왔는지에 대한 답은 차례로 풀립니다. 결국 이 소설은 배신 당했던 도연이 서림을 만나서 다시 마음을 열고 손을 잡는 이야기입니다. 서림은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에 벌어진 여러 일 때문에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요청하는 일을 하기 어려우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모두 도연이 담당합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려다가 사건 하나로 인생이 곤두박질 쳤고, 그 뒤에도 이 이상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던 도연의 삶은 오히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더 안온하며, 서림을 만난 뒤에는 에덴동산을 영위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은 도연과 서림의 구원담입니다. 『모형정원』이라는 제목 역시 모두가 죽고 이들 둘만 남은 에덴동산과도 같은 평온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테라리움과도 같고, 모형정원 같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세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외전에 등장하는 세계는 정말로, 기립박수를 치고 싶을 만큼 부러운 세계였습니다.(먼산)




가이드버스는 대개 SF 성격을 띄지만 이 소설을 더 SF로 보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면 내용폭로가 되니 살짝 접습니다. 거기에, 새로 추가된 가이드버스 설정이 있습니다. 같은 세계관도 어떻게 조율하냐에 따라 내용이 확 달라지는데, 그런 점에서 매우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더불어, 가이드 차별적이기 쉬운 세계관에 그 설정이 추가되면서 방향이 뒤집혔으니까요.

다만, 그렇다해도 도연이 20대 초반에 겪은 여러 사건들 때문에 경고 표시는 해둡니다. 가스라이팅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인권유린이 있습니다. 마수가 있다고는 해도, 가이드버스 세계관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해도, 분명 인권침해입니다. 그렇다보니 도연이 선택한 길과 서림이 선택한 길을 보고는 동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애초에 그 둘이 선택한 길이 제가 바라던 길이기도 했으니.(먼산)



세람. 『모형정원』. M블루, 2018, 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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