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두고 저런 헛소리(...)를 넣을까, 아니면 제목의 뜻 그대로가 소설 내용이라는 말을 쓸까 하다가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제목의 뜻을 모르고 보았다가 다시 찾아본 지금은 사전에 나온 뜻 그대로가 모두 다 소설 속에 있음을 알지만, 모르고 보았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제목 뒤에 적은 그대로, 세계멸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분류는 BL이고, 전체적으로 소프트에 가깝습니다. 베드신이 있지만 건너 뛰고 보아도 크게 무리 없...지만 소설 자체가 두 사람의 연애담을 다룬 것이니 그런 달달한 맥락이 뼈대를 이룹니다. 로맨스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키에란은 신성기사단의 총기사단장입니다. 약관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사로서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총기사단장입니다. 그리고 아일리스는 키에란을 보좌하는 부단장으로, 3황자입니다. 기사로서의 실력도 출중하고 행정능력도 뛰어나며 신성기사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 술식의 재능도 범인의 것을 뛰어넘어 천재라 불릴만 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이 둘이 서로 호감을 갖고 있다가 연애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둘 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데 급급한데다, 아일리스가 제국의 꽃으로 불릴 정도로 사교성이 좋아서 키에란은 일찍부터 마음을 접어 두었고, 아일리스는 자기와 연애하는 것이 어떤 사단을 일으키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키에란이 모르게 주변을 맴돌며 벌레만 제거합니다. 이 둘이 연애에 성공하는데는 한참 걸리며, 그리고 그 사이에 사건이 이것저것 터지고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마무리 됩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연애담으로 보면 사건은 뒤로 밀리지만, 사건을 앞에 놓고 보면 잠재되어 있던 여러 감정들이 폭발하여 제국의 멸망, 나아가 세계의 멸망까지 갈 수 있는 사건 중에 둘이 연애하는 이야기입니다.
초반에는 약간 위화감이 듭니다. 소설은 키에란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야기도 키에란의 시점에서 펼쳐집니다. 가끔 등장하는 외전은 아일리스가 주인공이지요. 그래서 초반에 드는 위화감은 그겁니다.
"왜 아일리스가 아니라 키에란이 총기사단장이지?"
성인이 된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애초에 기사단장이 되었을 당시 열일곱이었습니다. 게다가 검을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술식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술식을 쓰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단장인 아일리스는 위로 열 살 차이의 쌍둥이 남매가 있는 셋째입니다. 황제와 황후의 자식 맞고, 실력도 출중합니다. 외모는 두말할 나위 없지요. 그야말로 그려낸 듯한 인물인데 왜 그가 아니라 키에란이 총기사단장일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종종 키에란도 떠올립니다. 키에란은 기수(旗手)이며, '모든 이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깃발을 흔드는, 그 깃발 자체이기도 한 존재'입니다. 왜 그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는 아일리스의 시점에서 등장합니다.
3년 전, 제국에는 혼돈의 마물이 출몰합니다. 제국이 성립되었을 당시 초대 황제는 이 혼돈을 무찌르고 붉은 구세사로서 제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3년 전에 이교도들이 다시 한 번 그 때의 마물을 만들고자 하여 실제 만들어 냅니다. 그 때의 복제품에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마물은 그 주변을 다 먹어치우고 초토화시킵니다.
제국은 혼돈을 물리치기 위해 술사와 기사, 사제들로 구성된 대규모 인력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수장은 아일리스였으며, 혼돈을 물리친 것은 키에란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 밝히면 재미없으니 그 구체적인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아일리스의 시점은 여러 번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키에란과 아일리스의 첫 만남입니다. 그 때 아일리스의 심정은 몇 번이고 읽어도 웃음이 납니다. 그의 당황과 혼란과 경악이 동시에 읽히는 그런 이야기였지요. 다만 같은 때를 키에란의 입장에서 다시 읽어내면 또 다릅니다.
이들 둘이 처음 만나고, 호감은 있지만 마음을 서로 접거나 혹은 본격적으로 구애하는 그 상황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건은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고 그 둘의 장래와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기 전, 가장 큰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키에란이 아일리스에게 건넨 그 대사는 진짜로 달달하네요.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로맨스 프로포즈보다 더 무섭고 더 격하며 가장 로맨틱합니다. 그리고 그걸 실현시킬 힘이 있다는 것이 또 무섭지요.
앞부분을 읽어나가면 키에란은 매우 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지만 읽어나갈 수록 키에란에 대한 감정이 바뀝니다. 초반에는 어리숙한 인물,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매우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 그 다음에는, 인간 이상의 존재로. 아일리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일리스가 그 때 잡지 않았다면 아마 키에란은 그대로 살아갔을 겁니다. 그리고 뒤에 일어났던 사건들도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제국은 점점 더 망가졌을지도 모르지요. 제국에 또 다른 활력과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이 둘의 만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둘 다 첫 만남에서 첫 눈에 반해놓고는 내내 자각 못하고 있다가 한참을 돌아서야 손을 잡은 거니까요. 고생은 많이 했지만 결말을 보면 흐뭇하게 커플을 바라보게 되니 좋습니다. 달달하기도 하고, 그 둘의 고생이 정말로 세계 멸망을 막아내는 것이었으니 몇 번이고 칭찬해도 됩니다. 정말로요.
이 소설에는 마법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규칙을 이해하는 술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태생적으로 체득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부하여 알고 있는가에 따라 술사와 학사로 나뉩니다. 제국 내에서는 술사를 학사보다 높게 보고 있으며, 이는 초대 황제, 붉은 구세사가 술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이어 황제도 대대로 술사로서의 능력이 높은 이를 추천하고요. 능력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게 발목을 잡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부 설정을 포함해 켜켜이 잘 쌓아 올린 좋은 판타지입니다.:)
잼베리. 『디센트 1-5』. 피아체, 2018, 각 3500원.
그러나 편집 상태에 대해서는 불만이 한 가득입니다. 장면전환이 되는 부분이 많은데 구분선이나 문단 구분이 약합니다. 보통 장면이 바뀌면 단락을 바꾸고 앞 문단과도 여러 줄 띄워 놓는데 그걸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때문에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장면이 바뀐 거더군요. 그런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편집 미스라고 밖에 할 수 없네요. 피아체가 원래 그런 출판사가 아닌데 왜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