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 감상: 출판사는 마음에 안 들지만 소설이 좋았다.


이전에 조아라에서 연재되다가 완결을 못보고 넘어간 로맨스 소설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런 소설이 한 둘이 아니긴 하지만, 분량이 전자책 네 권이나 되다보니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그리고는 후회했습니다. 이 책, 교보문고에서 나온 책이더군요. 교보문고라면 치를 떠는데 미처 확인을 못한 겁니다. 게다가 이 출판사는 책 페이지당 가격이 미묘하게 높다고 느낍니다. 대체적으로 BL보다 로맨스의 책 가격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페이지 계산을 해봐도 만만치 않네요. 책 편집은 동일하니 페이지수와 가격으로 나중에 한 번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본 판타지소설 중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로맨스 자체보다는 판타지에 더 방점을 맞추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고요.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 "왜 전설의 화석이 되었는가."이고 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휴학 잘 안하는 아카데미에서 3년 휴학해서. 둘째, 그 휴학의 원인과 졸업까지의 지난한 과정 때문에.


애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애쉴리 루테는 백작가의 차녀입니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고 환생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환생자이기 때문에 가족과 약간 괴리된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의 귀족집안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카데미에 진학해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런 애쉬의 삶을 완전히 뒤틀어 버린 것은 맏이인 카넬리안과 마왕입니다.


북쪽에는 마왕이 있어 인간들이 찾아가기 어려웠고, 그 마왕을 물리치는 것은 매우 어려웠지만 애쉬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 일을 해치웁니다. 3년이 걸린 마왕 퇴치 프로젝트 뒤, 애쉬가 한 일은 복학입니다. 자신이 마왕을 물리칠 인물이라는 예언 때문에 3년간 휴학을 했으니 이제는 복학을 해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애쉬는 환생과 마왕 퇴치 때문에 노숙한 정신세계를 갖고 나이 어린 학생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닙니다.


그냥 평범했다면 모를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학교에 황자가 들어온 겁니다. 보통 황자들은 수도 근처의 아카데미에 다니는데, 귀족이 적고 평민이 많은 로지나 사립 아카데미는 황자가 올만한 곳은 아닙니다. 그랬는데 황자의 친구인 테르나크 벨로크와 그 쌍둥이가 진학했기 때문에 황자도 왔다는군요. 물론 황태자의 최측근인 카넬리안 루테의 여동생이 다니는 것도 그 한 이유일 겁니다.



이 이야기는 정치가도 아니고 겉보기에는 평범하나, 산전수전 다 겪어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부분은 눈치가 매우 빠르며 머리도 잘 굴러가는 마왕퇴치용사 애쉬가 이 모든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2황자 루크는 황태자인 형을 질투하며 이런 저런 사고를 꾸며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황제가 되고자 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확고한 후계자인 황태자와, 거기에 반기를 드는 2황자 루크를 두고 관망중입니다.

-마왕의 사망으로 북쪽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 되어 그 주변 왕국과 제국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중입니다.

-제국의 중추에 있는 루테 백작 카넬리언은 테러와 암살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등등.

이러한 사건들의 와중에 애쉬는 평온한 삶을 위해 애를 쓰다 눈이 자주 가던 잘생긴 청년과 연애를 시작합니다.



로맨스소설보다는 판타지소설에 방점을 두는 건 로맨스 자체는 굴곡이랄 것이 크게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애쉬를 믿는 테르와, 테르를 믿기 때문에 뭐든 물어보는 대로 답해주겠다고 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는 애쉬는 궁합이 잘 맞습니다. 테르가 참 귀엽기도 하거니와 애쉬가 끌면 끄는대로, 밀면 미는대로 가기도 합니다. 무뚝뚝하고 표정 없는 것 같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참 귀여워지는 천상 로맨스소설 남자주인공입니다.(...)



거기에 하나 더 하자면, 소설 설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위적이지 않게 소설 전체에 능력주의가 녹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귀족 작위는 장자에게 우선적으로 계승되지만 능력이 있다면 뒤집히는 것도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 속 가문들은 대개 장자가 월등이 뛰어나고 차자가 그럴 마음이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럴 마음이 있어도 제거되기 때문에 장자가 계승합니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능력 우선입니다. 귀족과 평민에 따른 신분적 차별은 있지만 돈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종족에 대한 차별도 있지만 노예 등은 처벌 대상입니다.

앞으로는 더 나은 세상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하는 건, 이종족과 원주민 친구를 둔 애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대로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그런 인물이 주인공이고, 또 힘을 갖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 겁니다.

황제가 여성이라는 것은 대화 속에서 단어 하나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카넬리언이 백작위를 이은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작위 계승 문제로 백작이 결혼을 미루기도 합니다. 용사는 애쉬입니다. 나중에 그 보상으로 애쉬 역시 작위를 받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설명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나타납니다. 이를 통해 소설 세계관 자체도 능력주의란 것을 자연스럽게 내보이는 거죠.


코르셋은 있지만 없는 옷도 있으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적절히 입는 것도 가능합니다. 여성도 검술훈련을 받으며 크게 저어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여성은 체력적 요건 때문에 남성보다는 불리하지만 애쉬가 있으니까요. 이 모든 설정은 애쉬 하나로 다 뒤바뀝니다.



에필로그를 보면 왜 제목이 전설의 화석인지 나옵니다. 앞부분에도 나오지만 뒤에서는 완전히 못을 박는군요. 행복한 결말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여러 등장인물들에게까지 매우 상냥합니다. 후계에서 밀린 인물도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해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결말부에서 언급된 그 커플의 이야기를 보고 더 그렇게 생각했지요.


재미있고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청종. 『전설의 화석』 1-4. 마담드디키, 2018, 각 3천원(합권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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