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내내 배가 아팠습니다. 위가 꼴리더군요. 읽는 도중에 특정 부분에서는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증상마저 나타나더랍니다. 그렇지만 한 번에 쓱싹 다 읽고는 상당히 만족하지만 완벽한 공감은 아니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역자 후기까지 보니 표지의 그림도 범상치 않게 보입니다. 지난번에 사노님이 구하셨던 이 책의 에코백이 확 마음에 들면서..(하략)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저자인 장샤오위안(江曉原)의 책 편력기가 중국현대사와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미처 생각 못했지만 중국은 개혁개방이 일어난지 오래되지 않았지요. 중국의 책이 한국에 쏟아 들어온 것이 90년대 후반이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개혁개방 이후에나 중국이 공산권이 아닌 국가와 수교를 맺었고, 그렇게 문화가 쏟아졌다는 걸 생각하면 개혁개방을 통한 도서 해금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문혁이라 물리는 문화대혁명 동안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죽었고 도서관도 죽었지요. 그랬음에도 밑바닥에는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흘렀답니다. 초등학교 당시 문혁 때문에 책들이 대부분 사멸하고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책을 구해 읽었는지에 대해 나옵니다. 이전에 BC님께는 말씀드렸지만 24시간 동안 십대 초반의 다섯 명이 돌려 보았다는 책은 조르주 상드가 쓴 『안지보의 방앗간지기』랍니다. 처음 들는 제목이라..ㄱ-; 그 시기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하룻만에 읽기도 했다는군요. 하하하.....
하여간 문혁을 거치고 그 뒤에는 조금씩 책 구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래도 아주 쉬운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손에 들어온 책은 복제를 하기도 했다는데, 이걸 보니 00년대 초반 중국의 저작권 개념이 개판이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더랍니다. 아주 조금만.
그 뒤에는 공장 다니면서 책을 읽었고, 학교를 진학해서 또 책을 보았고, 난징대 천문학과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고, 서점을 순례하며 책을 모았고, 베이징의 중국과학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천문대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만. 박사학위 받는 시기와 그 이후에는 단순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그걸 바탕으로 새롭게 논문을 쓰는 거죠. 그 몇 년 간 학술논문을 쏟아낸 덕에 윗분들의 허락을 받아 아예 재택근무를 했더라고요. 서재에 처박혀서 굴러 다니며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그걸 무한 반복. 하기야 지금처럼 압박이 없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양적 성과주의는 "백만 마리의 닭 속에 몇 마리 학을 풀어 놓으면 학을 알아 볼 수 없는"사태를 야기합니다. 논문이 쏟아지다보니 좋은 논문이 어떤 건지 옥석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죠. 크리스탈과 다이아몬드를 한 바가지 섞어 놓으면 거기서 다이아몬드 고르는 것이 쉬울까요. 그게 흐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렵겠지요.
SF나 판타지소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만, 중국쪽의 SF는 전혀 보지 않아 뭐라 말 못하겠습니다. 웨슬리라는 책이 소개되는데 이게 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도 아쉽고요. 아마 웨슬리라는 브랜드 네임(총서) 아래 여러 SF소설들을 낸 것을 가리키는 모양인데, 한국에서는 자체로 이런 시리즈가 나온 것은 없었을 테고, 예전에 빨간 책등으로 나온 SF총서 정도가 비슷할까요. 그거 원 제목이 뭐더라.;
다만 중국 작가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외국의 SF작가에 대한 이름이 전혀 안나오는 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합니다. 하기야 앞서도 고전을 제외하고는 외국작가에 대한 언급이 굉장히 드뭅니다.
그리고 중국의 이과와 문과는 굉장히 다르군요. 한국은 아주 심각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 이과라서 책을 빌려줄 수 없다는 건 황당합니다. 아니, 균형 잡힌 사고가 중요하지 않나요?;
책이 작고 활자가 작지 않아서 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번에 읽어 내려가면 부럽다는 마음과 지금은 안돼라는 마음이 충돌합니다. 제목에 적은 항산은 맹자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는 것은 선비뿐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항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연구자였고 맞벌이를 했고 딸 하나만 키웠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하면서도 항심을 잃지 않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선비입니다만, 지금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도 제가 항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항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요. 항산이 없다면 항심을 가지기를 요구하는 것은 ... 허허허허. 하여간 지금 시대에는 아마 무리일 겁니다. 지금의 중국은 아직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무리죠.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 세대에 항심은 둘째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것도 배부른 선배들의 지적질인지 모릅니다.
장샤오위안. 『고양이의 서재』, 이경민 옮김, 유유, 2015, 12000원.
폰트가 특이합니다. 편집도 특이하더군요. 읽는 도중 아마 조금 걸리긴 할 텐데, 익숙하면 별 문제 안됩니다.'ㅂ'
B님, C님이 재미있게 보실 듯. 하지만 두 분 모두 조금 많이 속 터질 겁니다...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