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데미 스기노는 무스케이크를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한 번쯤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해서 후회하지 않을 맛입니다.
이데미 스기노라는 이름을 안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Z님은 확실히 기억하실 텐데, 나카지 유키의 만화 『꿈의 궁전 피콜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한 연애물이었습니다. 남자 셋, 여자 셋이 좋아하는 상대가 다들 달라서 이래저래 꼬이더니만 결국에는 알아서 잘 세 커플로 나오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남주인공인 쿠보 카이리가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의 선배 요리사랑 같이 케이크를 먹으러 갑니다. 쿠보만 갔던가, 지나가던 선배가 보고서는 덥석 끼어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케이크 가격이 비싸지만 혀의 기억을 위해 눈 딱감고 먹겠다는 이미지더군요.
거기서 나왔던 대사 중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 냉동해둔 무스 케이크는 가장 맛있는 온도가 될 때를 유지하기 위해 녹는 시점을 맞춰 내놓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지 않더라도 미리 예약할 수 있다고.
만화에서는 기다렸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제가 갔을 때는 주문 과정에서 포장인지 먹고 갈지를 이야기하고 먹고 갈 것과 포장할 것을 함께 입력합니다. 계산은 나갈 때 하더군요.
개점은 11시. 저는 11시 08분에 도착했습니다. 매장 밖에서 줄서 기다리다가 매장 안으로 들어간 것이 11시 25분. 그리고 자리에 앉은 것이 12시 16분. 그 사이에 열심히 소설(pdf)을 읽고 있긴 했지만 힘들긴 하더라고요. 개점 전에 줄 서서 첫 번째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조금 늦은 겁니다. 실제 제가 나올 때쯤에는 여기저기 자리가 있었습니다. 12시 45분쯤 나왔거든요. 일요일 그 시간에 자리가 빈다는 것은 점심 시간에는 오히려 약간 여유가 있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앞서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두 명이서 케이크 여섯 개를 주문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장에는 먹고 갈 수만 있는 케이크와 포장도 가능한 것이 나뉘어 있는데, 10종이 조금 넘는 케이크 중 반은 포장 불가입니다. 따라서 먹고 갈 거면 아예 포장 안되는 걸로 골라 먹는 것이 낫지요.
제일 유명한 것은 초콜릿 무스 케이크로, 자르는 순간 사이에서 베리류 소스가 흘러 나온답니다. 응용편은 『꿈의 궁전 피콜로』에서도 보았습니다. 뭐, 이날은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서 초콜릿은 피했던 터라, 케이크 두 조각만 주문했습니다. 작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가서 직접 보면 그리 작은 편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요즘 케이크가 대체적으로 작기 때문에 이 정도면 작은 편은 아니라는 표현이 맞겠네요. 평소 먹는 고급형 케이크를 떠올리면 특별히 더 작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케이크 개당 가격은 600-700엔. 역시 부담가는 가격이긴 하지만 고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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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환율에서 한국 스타벅스의 케이크 가격이 엔화로 얼마인지를 따져보시면 이해 가실 겁니다.
주문한 것은 디플로마트와 에베레스트였습니다. 다른 것도 있었지만 그건 포장용이었으니까요. G 선물로 마롱 마들렌이랑 피낭시에 사다줬는데 먹으며 울더군요. 술맛난다며. 확실히 매장에 있던 안내문에는 제품에 술을 썼으니 아이들에게 줄 때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조심하세요. 술맛이 상당히 강한 모양입니다.
디플로마트는 베스트홈-그러니까 음식과 조리 및 식문화 잡지 쿠켄 출판사에서 나온 르코르동블루의 제과 시리즈 책에서 프랑스식 빵푸딩이라는 내용으로 보긴 했는데 실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김에 시켰고, 에베레스트는 추천 메뉴 중에서 가장 무난하게 먹고 싶은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름은 몽블랑 같기도 하지만 설명을 보면 베리류 소스가 들어간 치즈무스입니다. 딸기 무스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이날 가장 먹고 싶었던 걸로 골랐습니다. 이상하게 프레지에 같은 딸기계는 잘 안 고르게 되더군요. 특출하게 맛있다고 느끼기 어려워 그랬나 봅니다.
디플로마트는 동그란 그릇 위에 빵과 불린 말린 과일을 넣어 만든 푸딩 위에 크림을 올렸습니다. 딱 배 모양의 얄쌍한 크림인데 어떻게 이런 매끈한 크림을 올릴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달지 않고 아주 진하면서도 풍부한 우유 크림입니다. 우오... 크림 자체도 맛있네요. 위에 후추 같은 것에 말린 과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푸딩은 생각한 것보다 더 탱글탱글하고 진한 맛입니다. 커스터드 푸딩과는 상당히 다른 쪽이네요. 거기에 옴폭한 그릇에는 오렌지 계통의 주스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더랍니다. 새콤한 맛을 더하는데....
에베레스트는 크림치즈 아래에 시트가 있고, 속에 카시스 소스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위에 올라간 산딸기였습니다. 이게 싱싱해요. 산딸기 철도 아닌데? 얼린 것을 해동해서 올린 걸까요. 하여간 싱싱한 산딸기가 올라간 것을 보니 신기합니다. 치즈무스도 부담없고 거기에 카시스 소스가 새콤함을 더하니 이것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진이 왜 하나도 없냐 하실 텐데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입니다. 아예 케이크 사진도 찍지 않았고요. 케이크라면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음.. 그냥 먹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 여겨서요. 하기야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가게가 더 있었습니다.'ㅂ' 뭐,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글로 적거나 그림을 그리는 쪽이 훨씬 깊게 남으니까요.
12시 16분에 들어가 45분에 나왔으니 먹는 시간은 30분도 안됩니다. 주문한 것이 나오는 시간도, 계산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충분히 흠족했습니다. 무스케이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도 방문할지는 모르지만 한 번쯤 경험해볼만한, 아니 경험해야하는 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케이크도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