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미뤘다가는 아무 글도 안 나올 것 같아서 짧게라도 씁니다. 너무 길게 쓰면 뒤이어 올라갈 다얀 글이 안써질겁니다. 글을 길게 쓰거나 하면 기운이 죽 빠집니다.


이글루스가 SK에 인수되었을 때 바로 박차고 나온 것은 SK가 대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간략히 말해 대기업이 작은 기업 혹은 벤처를 인수했을 때는 뭔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의 목적은 수익 창출이고, 인수한 곳이 수익창출에 도움이 될거라 판단해서 인수를 했을 거란겁니다.

- 요약: SK가 이글루스를 인수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수익창출일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벤처의 차이는 저 수익창출에 있습니다. 벤처나 작은 기업은 자금이 굴러가는 한도 내에서 그리 큰 이익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직원 월급 나오고 기업이 잘 굴러가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있으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앞으로의 개발도 필요하겠지만 그건 상황 봐가면서 하면 되고 그리 급할 것이 없습니다. 여유를 두고 가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대기업은 다릅니다. 큰 기업들은 현재의 수익 창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수해서 자신들의 직원이 된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 단위, 월 단위, 분기 단위로 얼마나 일을 했는지 업무 내역서라든지를 요구할겁니다. 내(대기업)가 일을 시키고 그 댓가로 돈을 주는만큼 받는 돈이나 그 이상의 업무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거죠. 얼마나 업무를 했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서류에 어떤 일을 했다고 적을 수 있는 일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에 보여야 합니다. 특히 수치로 보여야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하는 사람들은 일을 만듭니다. 본인이 하는 기본적인 유지 업무 외에 새로운 업무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합니다. 대기업에서 사람들이 피폐해지는 이유중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만 주변에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생각을 한 발짝 더 보낸다면 새로운 업무를 끊임없이 만드는 과정에서 뱀의 다리를 붙였다 떼었다 하는 업무도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붙였다가 그냥 떼면 붙인 의미가 없으니 붙였다가 조금 잘라내고 닭발을 붙이거나 돼지발을 붙인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요. 물론 비유적 표현입니다.

- 요약: 대기업은 성과를 요구한다 → 그에 대한 압박으로 사람들은 뱀의 다리를 붙였다 떼는 것 같은 일도 일부러 만든다. 비효율적인 업무도 발생할 수 있다.


성과를 요구하면서 나타나는 직원들의 피폐 때문에 작은 기업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간의 상호 대화도 질이 떨어집니다. 제공자 쪽은 그리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용자는 예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뭔가 삭막하다라는 식으로 느낄 수 있겠지요.'ㅂ' 이부분은 이글루스를 이용하면서 나온 불평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전처럼 상호소통하는 서비스 변경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서비스 변경이란 것도 그런 곳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에 들어간다는 것은 예전보다 결재단계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SK 인수 전의 작은 이글루스에서는 어떤 사항에 대한 공개도 자체적으로 의논해 결정할 수 있었지만 인수 후에는 SK 내부의 작은 팀에 불과하니 팀장과 그 윗선에 보고하고 그 지시를 기다려야합니다. 의사소통 단계가 훨씬 길어질테고 이번 사태처럼 서비스 변경에 대한 공지가 갑작스레 나온 것도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어 생각해봄직 합니다. 그러니까 SK의 상위 결정층에서 이글루스도 11월 중으로 연령 제한을 풀어라라고 지시가 왔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글루스 팀에서 그 지시가 사용자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는 의견을 내서 그 의견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다시 말해 내부 의견이 조율되는 것이 예전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결론이 나면서 그런 의견 조율은 기업 내부사정이니 사용자들에게 공개하지 말고 대외비로 하라고 지시가 함께 내려왔다면 이글루스 팀은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지요.

- 요약: 대기업에 들어가 하부구조가 되었기 때문에 의사소통라인(결재라인)이 굉장히 길어졌고 이글루스 팀은 그 때문에 경색되었을 수 있다.


이글루스 자체를 하나의 커뮤니티로 본다면 이번 사태는 이전에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운영진의 경색과도 닮아 있습니다. 조금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누이트들은 사용자이고 SK는 서비스 제공자이며 이글루스 팀은 SK의 직원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이글루스에서 대규모로 인원이 빠져나가고 이 공백을 메울 수 없다면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서비스가 또한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전 성과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업무에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나 성과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난번에 어느 분께 이 말을 듣고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던 적이 있었지요. 눈에 보이는 결과나 성과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시점이 일주일 뒤일지, 한 달 뒤일지, 1년 뒤일지, 10년 뒤일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성과를 쫓아가다보니 기초과학과 인문학이 부실해지는 일도 생기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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