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부분만 아니었다면 올해의 책으로 꼽아도 문제 없을,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이 결말 부분에서 김이 확 샜거든요. 결말 때문에 이 책은 키다리 아저씨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로맨스소설로 생을 다하고 맙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취향에 비추어 그런 것이지, 전체적인 구조나 이야기, 각 인물들의 빼어난 입담, 건지 섬에서 벌어난 여러 사건들, 그 사건들 속에서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대단합니다.

저자는 출판사와 접촉하여 책 출간을 위한마지막 작업을 하던 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조카에게 뒷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출간하기 전에 사망하지요. 그 때문에 책의 저자는 두 명입니다. 메리 앤 섀퍼가 원저자, 애니 배로스가 책의 마무리를 도운 조카입니다. 원저자는 1934년 생이네요. 2008년에 사망했으니 노환이라 보아도 무방할듯합니다.

제2저자인 배로스가 말하듯이, 이 책은 『키다리 아저씨』와 비슷합니다. 다만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가 일방적으로 아저씨에게 보내고 있지요. 답장은 거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다 편지 글투가 굉장히 일상적이라 저는 오히려 『채링크로스 88번지』가 연상되더군요. 이쪽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에 거주중인 사람이 영국의 헌책방과 교류를 하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의 편지가 등장합니다. 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은 두 사람이지만 책방의 다른 직원들도 점차 이 서신교류에 끼어들거든요. 거기에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의 앞부분도 편지의 매개가 '책'이라는 점이 닮았습니다.

『건지』는, 2차대전 직후 영국에서 조금 인기를 얻은 어느 작가가 절친한 친구 소피랑, 친구의 오라버니이자 출판사 사장인 시드니랑 편지를 주고 받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건지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서, 주인공 줄리엣이 헌책으로 처분했던 책을 받은 사람이 다른 책을 구하기 위해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점점 커지지요. 오로지 편지글만 등장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읽다보면 그것도 아닙니다. 의외로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책 판매를 위해 판촉행사를 하던 줄리엣은 점점 지쳐가고, 거기에 연애문제와 새로운 책에 대한 소재도 끼어들어 점점 힘들어합니다. 그런 각박한 생활 속에서 가뭄의 단비가 되는 것은 건지 섬에서 날아오는 편지들입니다. 2차대전 당시 건지섬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독일은 줄창 영국을 공격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전쟁에서 패했지요. 그렇지만 건지섬은 작은 섬이었고 이를 방비할 전력도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독일군에게서 해방됩니다.

그,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 건지섬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물자는 부족하고, 섬에 있는 것만으로 자급자족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다양한 제약과 규제를 만들어 사람들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런 통제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요.

건지 섬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독일군에 붙잡혀 결국 수용소에 끌려갔고 전쟁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망나니에 말썽꾸러기,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주동인물로 부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용기있고 당차고, 또 희망이 있었으며 사랑스러운 여자로 봅니다. 극명하게 보이지만 어느 쪽이 더 옳은 시선인지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알 수 있고요.


...
여기까지는 좋은데,
데....
결말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뭐, 그런 결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순간 이 책은 로맨스가 되었습니다. 으흑흑;ㅂ; 딱히 솔로부대로서 커플지옥을 외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뭔가 결말이 아쉽네요.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도, 새 책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결국 앤과 비슷한 결말을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아.


그래도 C님이 말씀하신대로, 이거 오디오북 들으면 장난 아니겠습니다. 모두 전문 성우라 하시니 그 딱딱한 영국 발음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날지! 게다가 인물마다 나타날 그 어투가 어떨지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네요. 덕분에 저도 아마존 오디오북 결제를 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T

메리 앤 섀퍼, 애니 베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신선해 옮김. 이덴슬리벨, 2010, 13000원.


지금 교보에서 반값으로 팔고 있군요. 오옷. 조금 고민 되긴 하는데 집에 꽂을 자리가 없어..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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