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솔직히. 이 책을 보면서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식물학 용어, 학명, 영어명을 한국어로 상당히 깔끔하게 풀어냈거든요. 상당히라고 표현한 것은 제가 식물학 및 농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게 정확하게 번역된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렇게까지 찾을 수 있다니, 누군지 몰라도 엄청나게 공을 들였구나 싶지요.

...

그런데 번역자 이름을 보고 시쳇말로, 뿜었습니다. 평범한 표현으로는 기겁했으며, 고상한 표현으로는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분이었거든요. 이글루스의 프님이십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번역자 이름을 확인하고 머릿속에 저 초성이 절로 터져 나오면서 크크크크 웃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 문어와 구어가 일치하는 언어 생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저 때는 미친듯이 속으로 웃었습니다. 아, 프님. 이런 책도 번역하셨군요. 고생많으셨습니다.T^T

읽다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일들을 크게 종으로 나누어 놓고, 그 종에 해당하는 옛날 식물학 서적에서 나온 삽화를 함께 실어 놓았습니다. 그 그림도 굉장히 예쁩니다. 책 자체도 예쁘고, 실린 그림도 예쁘고, 편집도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고, 책의 만듦새도 좋습니다. 아마 두 군데쯤 오타인지 띄어쓰기 실수인지가 있었던 것 같지만 넘어갑니다. 하여간 웃음이 나오는 건 책 자체가 유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일의 유래, 과일의 역사, 과일의 야사(野史)를 함께 보여주는데 그 뒷이야기들이 굉장히 웃깁니다. 어떤 의미로 웃기냐 하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과일과 관련한 미신 같은 것도 함께 등장하거든요. 엉뚱하게 사용하는 모습이나 엉뚱하게 오해받는 모습을 보며 비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도 안 그런다고는 말 못하지..;

물론 유머만 담은 것은 아닙니다. 블랙 올리브 절임은 녹색 올리브를 염색-정확히는 화학처리-해서 만든 것이라든지,


다만 대황은 영어명인 루바브를 같이 기재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황이라는 이름을 듣고 먼저 떠올린 것이 대마라..ㄱ-; 대마랑 순간 헷갈려서 대마가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0초쯤 고민하고서야 대황이 루바브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브레드프루트도 조금..? 이건 제 문제이긴 한데, 저는 빵나무로 번역한 쪽을 먼저 알고 있었거든요. 이건 어렸을 적 읽은 웅진세계전래동화 때문입니다. 하와이편에서 그렇게 빵나무를 강조한터라, 저도 빵나무로 자연스럽게 인식해서 그렇습니다.

노아와 가족붕괴는 그 ....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가 다시 땅에 도착한 다음, 노아의 딸들은 인간의 번창에 대해 고민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노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다음 동침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건 와인은 취할 정도로 마시면 안된다는 이야기겠지요. 하하하;

파파야에 불임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떠오른 것은 「그린 파파야 향기」입니다. 그 왜, 영화말입니다. 영화를 본 적은 없고, 그 내용만 대강 알고 있는데 그린 파파야에 불임효능이 있다니까 영화 제목이 그냥 들리지 않는군요.;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보다 가장 웃겼던 것은 111쪽에 나옵니다. 사과에 대한 설명중에 이런게 있군요.

(중략)
사과에 함유된 다량의 펙틴은, 다른 과일로 젤리를 만들 때 사과를 같이 쓰는 이유이며(펙틴은 과즙이 굳는 것을 돕는다), 또한 인체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

........................뭔가 이상해. 말이 안돼. 제가 가지고 있는 화학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보다 훨씬 뒤쪽 페이지에는 옛날 옛적에, 불법 핵 선적물을 탐지하던 시절에는 경고등이 작동하면 바나나화물인지 아닌지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네요. 대량의 바나나 화물은 핵 선적물의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하여간 책도 잘 만들었고 읽는 재미도 있습니다. 식물이랑 과일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어요. 일단 T님께는 책 들이밀어봅니다. 후후후후~



마이크 다턴. 『세밀화로 보는 과일의 역사』, 정은지 옮김. 오브제, 2013, 13000원.

botany란 단어는 어디선가 종종 들었는데, 이게 식물학을 가리킨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처음 인지했습니다. 식물과는 별 연관이 없어보이는 철자라 전 패션이나 의상디자인 쪽인줄 알았지 뭡니까.ㄱ-;

하여간 이 책의 원제는 『The naming of names』로, 넓게는 식물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마무리는 린네나 그 시대 사람들로 끝난다 생각하시면 얼추 맞습니다. 하지만 시작이 만만치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소요학파를 이끌었던 테오프라스토스가 주역입니다. 과학적으로 식물에 접근해, 식물을 어떤 식으로 분류하고 나누어야 하는지, 약초학이 아니라 식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뒤 몇 천년 간 묻혔습니다.(...) 대부분 약초에만 관심이 있지, 그 분류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어떻게 식물학자나 식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식물을 제대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책을 썼는가에 대해 다루면서 식물학이라는 학문이 자리잡기까지를 다룹니다. 원서 제목이 왜 저런지는 직접 보시면 아실겁니다. 그러니 설명은 넘어가지요.
하여간 이런 내용이라 이 책의 한국 번역 제목이,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고대 희귀 필사본에서 근대 식물도감까지 식물인문학의 모든 것』인 것도 당연합니다. 이 제목이 이 책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자, 일단 저격(!) 대상은 B님과 C님과 T님. T님은 식물학에 관심이 있으시니 재미있게 보실겁니다. 물론 재미없으시면 뒷부분에 집중해서 보셔도 좋습니다. 식물학의 역사 전반을 다루고 있으니 꽤 괜찮거든요. 번역도 이 무지막지한 주제분야를 생각하면 상당히 훌륭합니다. 몇몇 인물 명에서는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단합니다. 그리스어부터 시작해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기타 등등을 망라한 이름을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거기에 각 인물명 옆에는 철자도 함께 달아놓았습니다. 물론 한 번만. 처음 등장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원래 이름을 놓았으니 위키백과든 사전이든 뭐든 찾기 편하겠더군요. 거기에 책 뒤에는 아예 성의 알파벳 순으로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간략하게 나왔지만 이해하는데는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이들에 대한 연표도 따로 다뤘고요. 만세! 이런 멋진 책이라니.;ㅂ; 입문서로는 그만입니다!

C님을 낚을 최적의 요소는 제목에도 나오지만 필사본입니다. 그러니까 이 저자, 대단해요. 유럽 각지의 유명 도서관에 들어가 식물과 관련된 여러 고서들을 열람신청해 일일이 보고 있었나봅니다. 사진과 그림이 풍부한데, 그 절반 정도는 그런 고서들에 실린 그림과 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C님께도 추천. 고서 보는 것만해도 눈이 호강합니다. 예를 들면 케임브리지의 고서도서관에서 감시자의 눈길을 받으며 책을 보고 있었다거나... (부럽다.;ㅂ;)

B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식물학이라고는 하지만 과학 전반의 이야기이고, 처음부터 저자는 '초기 식물학 서적의 그림 은 개판이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림의 역사도 얼추 얽혀 있습니다. 초기에는 식물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고, 이게 실제 있는 식물이 맞는지 아니면 상상으로 그려 넣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랬는데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점차 식물 그림이 세밀하고 섬세하게 발전합니다. 그리고 그 최고봉은 알브레히트 뒤러. 뒤러의 그림은 이 책에도 실렸는데, 정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저자에게는 '그 어디(식물학 서적)에도 없었던 환상적인 그림'이겠더라고요.


기본은 교양서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유럽 지성사에 가까울지도 모르며, 그 식물학자(나 관련학자)들의 네트워크도 함께 다루고 있으니 재미있게 보실 겁니다. 네트워크 이야기를 왜 꺼내냐 하면 웃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 글로 넘어갑니다.:)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껍데기는 못 보았는데 이런 거였군요. 예쁩니다. 하지만 속표지도 참 예쁘다능!


애너 파보르드.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구계원 옮김. 글항아리, 2011, 38000원


덧붙임.
가격이 상당하지만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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