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라에서 연재될 당시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아포칼립스 소재, 그것도 좀비라면 매우 피하고 싶은 소재거든요. 공포소재 중에서 제일 마음에 안드는 것이 좀비입니다. 『퇴마록』에서 등장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억지로 끌려와 약물로 이지를 잃은 존재였지요. 지금 좀비라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 잡아 먹는 괴물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고 보니 『전갈의 아이』에서도 이짓이라 불리는, 그와 비슷한 존재가 등장하네요. 약물 중독을 통해 만들어낸 노예라는 점에서좀비와도 매우 비슷합니다. 하기야 지역도 그 언저리였지요.

 

그래서 『도마뱀의 관』도 연재 당시에는 손을 못댔습니다. 책으로 출간된 뒤에는 구입했지만, 지난 달에 구입하고는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려 놓고 있었지요. 그랬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 소장본 제작이 진행되거든요. 소장본을 신청할지 말지 고민중이라 내용을 봐야 결정하겠다 싶더랍니다. 그리하여 어제부터 시작해 내리 읽어내렸습니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먼산)

 

 

『도마뱀의 관』은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그러하듯 SF입니다.

 

리온 메이는 어느 날 아침 눈에서 깼을 때,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장통에 있어 시끄러워야 하는 곳이, 이상하게 조용합니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요. 핸드폰도 지난 밤 12시 이후에는 갱신되는 정보가 없어 먹통입니다. 그리하여 10년 전 모델인 구형 노트북을 켜서 접속하니, 재해 대책 프로그램이라는 이비가 가동됩니다. 이비는 인공지능형 프로그램으로, 핸드폰까지도 옮겨서 재해 관련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이비가 제공한 정보는 이렇습니다.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죽었다가 괴물로 다시 태어났다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과 생존자의 모습은 곧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수도로 가야한다는 안내에 따라, 리온은 이비와 함께 수도로 향합니다.

 

이 소설은 리온이 괴물들을 뚫고 수도까지 향하는 로드무비와도 같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생존자들을 만나고 괴물들을 만나고, 또 갈가마귀-레이븐이라는 이름의 남자도 만납니다. 레이븐은 종종 리온과 같이 행동하여 수도로 향하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과 함께, 리온은 험난한 상황을 헤쳐갑니다. 평범한 대학생이 헤쳐나가기에는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특히 괴물들이 진화하면서 난관이 닥칩니다.

 

 

본편 자체는 2권에서 끝납니다. 2권 중반부터 3권까지는 전체가 다 외전입니다. 아니, 외전도 매우 중요한 소설이라니까요. 위화감은 초반부터 매우 열심히 일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수도로 향하는 리온을 응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낱낱이 드러난 다음엔? 더더욱 응원하게 됩니다. 수도에 가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사정을 알고 나면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리온은 PTSD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하는 내용 폭로라 접어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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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앞 뒤가 안 맞다는 건 계속 나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기억이 적고, 그마저도 안 맞는 일이 많습니다. 리온이 뭔가에 계속 휩쓸린다는 점, 그리고 귀가 얇은 존재라는 점 또한 힌트 중 하나입니다. 그래요. 꿈 속에서는 앞 뒤 안 맞는 이야기도 많고, 현실의 나와 다른 이야기가 흘러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가게 되지요. 그게 귀가 얇은 모습으로 나옵니다.

네. 꿈입니다. 이 모든 것은 꿈입니다. 하지만 왜 리온이 이렇게 쫓기고 있는 꿈을 꾸는가는 꿈 속에서 등장한 여러 힌트를 통해 나옵니다. 이비의 존재와 레이븐의 존재는 조력자 그 이상입니다. 특히 레이븐이 등장할 때의 위화감은 상당합니다. 힘없는 대학생 청년을 경험 많은 군인이 지켜준다는 건, 할리킹이나 가이드버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도 반전으로 작용합니다. 꿈 속의 리온 메이가 아니라, 원래의 리온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순간, 꿈은 깨지고 상황은 반전됩니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므서운 쿠믈 쿠얻쿤하"-는 레이븐이 설명합니다. 레이븐만 있나요, 악당도 등장하지요.

이 소설 속의 악당은 매우 이상적인 악당입니다. 나름의 불운한 사정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그 불운한 사정마저도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Born To Evil 스타일입니다. 악마의 자식, 오멘이냐고요?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안 좋은 성격과 안 좋은 능력과 과대포장과 과대망상을 한몸에 지닌 멋진 악당입니다. 미워할 수 있어서 더더욱 좋고요. BL소설에서 이런 악당들은 종종 주인공에게 집착하거나 성적으로 학대하고 괴롭히는 모습도 보이는데, 전혀 그런 건 없습니다. 리온을 그쪽으로 괴롭히는 인물은 약혼자뿐입니다. 아니, 정말로요.

 

 

앞서 아포칼립스는 SF라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 소설은 여러 모로 SF의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특히 판타지와 근미래를 섞은 모양이 그러합니다. 그건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상 또한 그렇습니다. 직업, 직종, 신분에 있어 성차별은 없고, 신분차별도 거의 없습니다. 귀족이 있기는 하나, 그보다는 법이 앞섭니다. 귀족들은 혈통 중심이 아니라 능력 중심, 능력개발중심입니다. 남성도 임신이 가능하며, 이는 오메가버스 세계관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또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러한 설정들이 자연스레 녹아 있는 것이 또 매력적입니다.

 

최근에 로맨스소설 읽으면서 분노 폭발의 상태가 되었더랬지요. 왜 여성들이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세계관이 디폴트 세계관처럼 퍼져 있는가 싶어서요. 오히려 BL의 세계관이 더 미래지향적입니다. .. 하기야 로맨스도 판타지로맨스를 찾아봐서 그런가요. 근미래쪽은 안봐서 그런가.=ㅁ= 하여간 BL을 더 붙잡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2RE. 『도마뱀의 관 1-3』. 피아체, 2018, 1권 3800원, 2권 3400원, 3권 2800원.

 

그리고 사양확인한 뒤, 고이 구입을 결정합니다. 최근에 소장본 덜 사서 통장이 행복했는데, 다시 손대면....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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