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에만 올리고 까맣게 잊은 이야기.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143438&novel_post_id=71822



내...년이 아니라 올해 목표 중 하나는 이 이야기의 본편에 해당하는 용과 도서관을 쓰는 겁니다. 대강 어떤 방향으로 보낼지는 생각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네요. 꾸준히 쓰는 것이 목표. .. ..하지만 G4는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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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rary is best place to find the cat – feat. by Ed Sheeran, ‘Shape of you’


일리히가 언제 학당에 왔는지는 백운이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 꾀죄죄하고 작은 꼬마가 다 떨어져 가는 신발에 낡은 옷을 입고 학당으로 오는 길을 걷고 있던 걸 발견한 게 백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백운은 륜이 간밤에 도서관 저 멀리에서 귀인이 오는 꿈을 꾸었다며 밖으로 쫓아내는 바람에 불편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던 참이었다. 억지로 밀려 나왔지만 4월의 날은 따뜻했으며 봄이 오고 있다는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지다 보니 부루퉁한 마음도 걷는 사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리고 새싹들을 만끽하며 간만의 산책을 즐기던 와중 학당으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리히란 이름을 얻은 어린 장수족은 백운에게 발견된 덕에 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장수족의 생태는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가 쉽지 않다. 일설에는 인간과 다른 생장 속도를 보이는 이를 통칭하여 장수족이라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에 인간형의 모든 종족을 포함할 것이냐, 아니면 이족보행이 가능한 종족을 총칭할 것이냐는 이견이 등장하면서 결국 의견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하여간 장수족은 사례연구만 가능하며 그런 사례연구마다 다르고 또 같은 부분이 각각 나타나서 일반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다. 일리히는 그런 장수족 중에도 특이한 경우로, 처음 학당에 왔을 때는 열 살 남짓으로 추정했으나 실제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으며, 그 상태로 몇 년 정체되어 있다가 4년째부터 점차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넷 전후의 외모를 가졌을 때 또 한 번 성장을 멈췄으며, 그 다음에는 5년이 지나서야 다시 성장했다. 약관을 갓 넘긴 외모를 하고 있을 때는 이미 서른을 넘겼으며 그 뒤로는 나이 세는 것을 멈췄다. 이미 그 전부터 성인으로 인정받았으니 나이를 세는 것이 무의미 한데다 나이 세는 것을 포기한 존재들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멈춘 것도 있었다. 소륜학당의 창립자로 용(龍)인 륜의 나이는 학당의 나이에서 역산이 가능하지만 같은 용(龍)인 백운은 그보다도 훨씬 위다보니 계산이 쉽지 않았고, 학당의 기록관장을 맡고 있는 신수(神獸) 제로디안도 나이 추산은 가능하지만 밝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학당은 나이가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일리히의 담당 업무는 참고봉사 또는 레퍼런스 서비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참고봉사의 꽃이라는 도서관 1층 홀, 혹은 로비에 있는 안내창구 옆 1차 참고봉사 업무다. 학당에 정착하고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는 모든 자료실을 돌아가며 근무했고, 들어오는 자료들도 가리지 않고 모두 확인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 읽어버릇하니 급기야는 도서관의 장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이로 손꼽을 정도가 된 것이다.


참고봉사 업무는 아침, 점심나절, 저녁을 번갈아 자리를 지켜 이용자를 맞이하고 그 외에는 도서관의 자료를 살피는데 쓴다. 개인의 서재였던 곳이 이제는 학당의 도서관이 되어 그 규모가 커진 만큼 다양한 자료를 보고 확인하는 것이 업무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자료를 보고 그것을 기존의 자료와 엮어,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이용자가 오면 그가 찾는 자료와 관련 타래를 알려주는 것이 참고봉사이고 그것이 일리히의 업무였다. 물론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각각의 담당 사서가 있지만 일리히는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분야의 참고봉사를 담당한다.






린네라는 이름은 약초학자인 캐드펠이 붙였다. 식물을 무리지어, 각각의 가족으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린네이고, 그래서 약초학과의 고양이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웃었다. 린네라는 이름 뒤에는 에르브, 즉 향신채인 herb를 성으로 붙였다. 린네 에르브. 그것이 노란 고리의 녹색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장수족 특성이 뒤늦게 발현한 장년의 캐드펠 교수가 데리고 다니면서 더더욱 이름이 알려졌다. 사람을 차별하는 고양이로 유명한 것도 있었다. 캐드펠 교수에게는 먼저 다가가지만 특별히 애교를 부리지는 않으며 그럼에도 항상 붙어 다녔다. 게다가 장수족인 캐드펠 교수가 나이를 먹어가는 사이, 고양이도 몇 개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길 몇 번 반복하다보니 대를 잇고 있거나 탈피하는 것이 아닌가란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포유류다보니 탈피나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의 샘에서 회춘하고 돌아오는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소문으로 살이 붙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지금 도서관 홀에서 넋을 놓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스테트?”


검은고양이가 노란눈을 반짝이며 빛이 들어오는 도서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서관은 서고도 많고 워낙 크지만 용들이 설계한 공간이라 용들의 전매특허인 공간마법을 적절히 잘 활용했다. 그래서 중앙 홀은 3층 높이에서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며 그것도 유리에 걸린 마법으로 직사광선이 아니라 은은하게 퍼져 내려오도록 설계되었다. 그 덕분에 천장을 바라보면 밝은 날에도 무리 없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서 처음 방문하는 이용자들은 저 고양이처럼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다만 검은고양이다보니 고양이 모습의 신, 바스테트와 같아 보였다는 것이 독특했던 것이다.


일리히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고양이는 꿈에서 깬 것처럼 움찔하고는 돌아보았다. 노란눈인줄 알았더니 검은고양이들에게서 흔히 보는 녹색눈이다. 그것도 홍채 가장자리는 노랑을 띈 녹색 눈. 고양이는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일리히가 있는 참고봉사 데스크로 다가와 일리히 주변을 돌며 관찰했다. 학당 주변에는 개나 고양이나 다 많았고 도서관에 들어오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라 일리히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래서 고양이가 슬그머니 다리에 몸을 붙여 왔을 때는 흠칫 놀랐다. 일리히의 몸짓에 덩달아 놀란 건지 고양이는 커다란 눈을 맞춰왔다. 놀란 것이 미안한 마음에, 일리히는 슬며시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곧 고양이는 발랑 뒤집어 배를 보이고는 목 안 쪽에서 골골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리히가 쓰다듬는 손길을 즐겼다. 계속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업무는 마저 끝내야 하기에 손을 떼자, 고양이는 곧 무릎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어쩔 도리 없이 일리히는 웃음을 가벼운 한숨으로 쓸어 내리고는 도로 자료정리에 집중했다.


고양이의 정체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고양이보다는 덩치가 있지만 뚱뚱한 것은 아니고, 다만 크기가 클뿐인 고양이. 거기에 노랑으로 보이기도 하는 녹색 눈.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 몸을 붙이는 것은 소문과 달랐지만 외모만 봐서는 식물학부 약초학과의 린네 에르브 같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당 내의 여러 정보를 수집하다보니 학당 내의 동물들에 대한 정보도 대강 알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는 이런 저런 경로로 다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캐드펠 교수님의 반려동물이라 알려졌지만 사실 동거묘로 표현하는 것이 맞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약초를 수집하고 약초밭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특이한 고양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고양이라고는 하나 인간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 다시 말해 인격을 가진 존재로 추정된다는 것도. 이 정보는 기록관리학 교수인 기록관장 제로디안에게 들었다. 예전에 자료를 찾아주었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그날의 업무를 다 마무리할 때까지 고양이는 내내 일리히의 주변을 맴돌았다. 퇴근하기 위해 짐을 정리할 때가 되자 고양이는 짐 정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리히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약초밭으로 가는 건가 했지만 약초밭으로 가기 위해 갈라지는 길에서도 쫓아오는 것을 보고 일리히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 놀러오는 거야?”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좌하여 듣던 고양이는 야옹하고 답했다. 잠시 생각하던 일리히는 웃으며 흔쾌히 고양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고양이에게 줄만한 것이 없나 찬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고양이가 올라와 우유와 샐러드용으로 만들어 두었던 닭고기를 앞발로 가리켰다. 율리히가 자신의 몫으로는 연어 샐러드를 준비하면서 연어 몇 덩이도 따로 떼어 닭고기와 함께 내어 주자 고양이는 사양하지 않고 식탁에 올라와 맛있게 먹었다. 마실 것으로 우유 한 대접을 내놓자 그것도 말끔하게 비우고는 설거지할 때는 옆에 올라와 구경하고 있었다.


자기 전 자몽향 차를 한 잔 준비해 침실로 들어왔더니 따라와서는 먼저 침대에 올랐다. 일리히는 베갯머리 책을 꺼내 들고 차를 홀짝이다가 옆구리에 붙어 있는 고양이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이름은 린네 에르브지?”


눈을 지그시 감고 골골 거리던 고양이는 살짝 눈을 뜨고 눈을 맞춰 오더니 도로 감았다. 긍정의 의미 같았다. 아니었다면 뭔가 다른 의견 표시를 했을 것 같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고양이라더니 이쯤 되면 대화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그날 밤 린네는 일리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잤다.


아침에 일어난 일리히는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났다. 린네는 더 잘 모양인지 미동도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양이는 워낙 잠이 많은 동물이니 그럴 거라 생각하고 출근하면서, 살짝 창문을 열어 두었다. 방범 마법이 걸려 있어 창문 열린 정도로는 별 문제 없을 거였다. 들어가는 것만 막지 나오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온 일리히는 도서관에 가기 전 약초학과의 밭으로 찾아갔다. 예상대로 아침 일찍이지만 캐드펠은 밭에 나와 잡초를 뽑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군.”


“그보다 교수님이 도서관에 안오신다 해야겠지요. 잘 지내셨나요.”


“나야 항상 그렇지 뭐.”


장수족의 발현 증상이 늦었던 캐드펠이나, 장수족 발현이 특이하게 나타난 일리히는 일찍부터 알아온 사이였다. 도서관에 들어가면서는 주로 업무로 만나긴 했지만 알고 지낸지 오래되어 간만에 만난다 해도 거리감 같은 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간밤에 고양이가 저희 집에서 지냈습니다. 알려드리려고요.”


한창 잡초를 뽑고 있던 캐드펠은 허리를 피며 웃었다.


“오늘은 거기였나. 요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느라 잘 오지도 않거든. 봄이라 밖에서 자도 크게 문제는 없고, 밭의 건초더미에 들어가서 자는 일도 부지기수고. 근데 어디서 만난 거지?”


아무래도 린네는 밭 주변을 돌아다니는 터라, 밭 근처에 오가는 것이 아닌 일리히와의 접점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일리히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죽 풀어 설명해주었다.


“아아. 맞다. 도서관 로비가 햇살이 잘 들어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몸 녹이러 들어간 건지도 모르지. 근데 쫓아갔다면 조금 특이하긴 한데. 본래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누군가를 따라가는 일은 드물거든. 어쩌면 한 눈에 반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캐드펠 교수님이 주인이시니…….”


“그건 아냐. 린네는 약초학과의 고양이지만 주인은 없어. 나는 그냥 가끔 챙겨주는 정도고 린네의 주인은 린네 에르브 본인이야.”


본인이라는 단어가 조금 안 맞기는 하지만 고양이 자신의 주인은 고양이라는 말은 알아 들었다. 일리히는 린네의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의 유의점을 몇 가지 더 듣고 나서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도서관이 사람 만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는 캐드펠 교수에게서 들은 바 있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일리히의 침대에 누워 있자니 어제 씻고 났을 때 났던 자몽향이 풍겨왔다. 새콤하지만 달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향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린네는 일리히가 나간 뒤에도 한참을 침대에서 굴러 다니다가 나왔다. 이불에 굴을 파놓고 나온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이리저리 입으로 물어 이불을 잘 정리하고 가능한 평평하게 만들고 나왔다.


식탁 위에 올라가자 어제 식사했던 자리에 생선 약간과 닭고기, 물이 있었다. 가능한 옆에 튀지 않도록 조심히 먹고 다시 자리를 정돈한 뒤 슬쩍 돌아보니 부엌 창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어젯밤 닫고 자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건 일부러 열어 놓은 모양이다. 닫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이상 어렵다. 인간이라면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건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린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와 약초밭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도 도서관 로비에는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검은고양이는 도서관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들어가더니 로비 한가운데, 햇빛이 내려오는 자리에 잡고 잠시 명상을 하다가 몸을 죽 뻗어 기지개를 켰다. 시계도 볼 줄 아는 건지, 오후 근무가 끝나는 여섯시가 가까워지자 느긋한 걸음걸이로 참고봉사 데스크로 다가왔다.


“고양이 키우세요?”


오늘의 참고봉사 마지막 이용자인 에디르는 윤기가 반들반들한 털을 가진 린네를 보고 눈을 빛냈다.


“키우는 건 아니고, 어제 나를 따라오더라고. 오늘도 같이 가려나봐.”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같이 퇴근하시게요?”


퇴근만 같이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 살짝 돌려 물었다. 일리히는 잠시 망설이다가 린네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퇴근할까?”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린네는 일리히에게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고는 발라당 드러누워 골골댔다. 일리히는 더 못참고 자리에 주저 앉아 린네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되었네.”


이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에디르는 집사가 간택 받는 건 오랜만에 보았다며 활짝 웃었다.


그 다음날, 에디르는 주변의 고양이 집사들에게 이것저것 받아왔다면서 고양이 용품을 하나 가득 들고 왔다. 다른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과 같은 걸 쓰면 되지만 가끔 쓰게 된다는 고양이 전용 세정제와 고양이의 간식, 그리고 생식 만들 때의 주의점 등을 적은 작은 수첩이었다. 에딘도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것이고 새로 집사가 되는 이에게 전해주도록 들었다며 손때 묻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그거와 함께 같은 크기의 조금 더 두꺼운 빈 수첩을 내주었다.


“이 수첩 내용을 새 수첩에다가 옮겨 적으며 정리하는 겁니다. 본인이 할지 말지는 자율이지만 하는 쪽이 남는 게 많아요. 음, 자기가 겪은 일들도 같이 적어 놓으면 좋고요. 그리고 적어 놓은 걸 이 수첩 뒤에 덧붙이면 됩니다.”


에딘은 수첩 뒷부분을 펼쳤다. 앞의 절반은 한 사람의 글씨지만 그 다음의 세 장, 그 다음의 다섯 장, 그 다음의 한 장 등등 뒤는 서로 다른 글씨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의 크기와 몸무게 등의 특징을 적고 그 뒤에 앞서 적힌 곳에는 없었던 고양이 정보를 추가한 모양이었다. 그 형식은 본편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적은 세 장짜리 메모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양식 맨 앞에 있는 작성자 이름이 익숙했다.


“누군지 아시죠?”


“이 이름이 진짜 저……?”


“학당 내에서 그 이름을 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아요. 제로디안. 도서관 옆집 주인이요.”


농담처럼 에디르가 덧붙였지만 주인은 아니고 도서관 옆 기록관장이다.


“저도 수첩 받으면서 들은 건데 기록관에 쥐 대책으로 고양이를 들였을 때, 그 당시 기록관 직원 중 한 명이 기록관장에게 이 수첩을 건넸다고 그래요. 그걸 보고 고양이 키우는 자체 매뉴얼을 만들었고, 매뉴얼과 별도로 이 수첩은 기록관의 민간기록물로 지정하고 거기에 자신이 직접 추가 분량을 썼다고 해요. 들은 것이긴 하지만 글씨체가 맞다는데요. 그리고 보존마법을 걸어서 기록관 내에 보관하다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빌려주고요. 대신 나중에 맨 뒤에다가 추가 내용을 적는 것이 조건입니다. 저도 그렇게 받아왔고요. 그러니까 다 옮겨 적으시면 기록관에 반납하세요.”


반납하고 나면 나중에 또 필요한 사람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대신 고양이수첩을 빌리러 간단다. 수첩 구입비용 같은 것은 학당 내의 고양이 동아리에서 부담한다던가. 그 고양이 동아리는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여러 고양이들을 포함해 특별한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들을 위탁 관리하고 있으며 이렇게 고양이 집사가 나타나면 고양이 키우는 것을 돕는다고 했다.


“나비당의 목표는 모든 고양이가 안락한 생활을! 이니까요. 고양이가 안락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고양이 주인인 집사부터가 고양이를 잘 알아야 하고요. 고양이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있고, 식생활도 알아두면 좋아요.”


그 덕에 일리히는 린네를 집에서 키우기 위한 준비를 수월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나비당에 후원금액을 내고 6개월 간 아침 출근시간에 도서관 뒤쪽의 고양이 급식소를 담당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원래 그 급식소를 맡고 있던 도서관 직원은 장기 출장으로 이웃 국가인 이안에 간지라 대신 맡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학당 내에 고양이 급식소가 있다는 것은 지나가다 봐서 알고 있었지만, 학당 내의 고양이 동아리 이름이 나비당이고, 그 동아리가 급식소 위탁 운영을 맡고 있고, 도서관 뒤에도 고양이 급식소가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도서관 뒤편은 바로 숲과 연결되어 있어 고양이 외의 다른 동물들도 종종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급식소라고 하지만 물통과 고양이용 사료를 놓는 것이 전부라, 아침에 동아리 창고에 가서 사료와 물을 가지고 가서 청소하고 놓은 뒤 퇴근하면서 사료통만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되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도 좋네.”


일리히는 수첩 옮겨 쓰는 그 옆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는 린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린네가 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일리히의 일상은 몇 가지 다른 일들이 추가되었지만 별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린네가 침대에서 더 자는 사이 출근 준비를 하고, 린네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뒷정리를 하고 함께 출근한다. 출근길에 도서관 뒤 고양이 급식소에 들러 청소를 하고 물통과 사료통을 채운 뒤 도서관에 온다. 린네는 거기서 바로 텃밭으로 출근해 들쥐들을 살피고 일리히는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업무를 먼저 마친 린네가 항상 도서관에 와서 로비의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다가 함께 퇴근하는 걸로 끝냈다. 집에 돌아와서의 청소는 침구에 묻은 린네의 털을 터는 것부터 시작했다. 털을 털고, 바닥 청소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치면 남은 시간은 수첩을 옮겨 적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린네는 일리히가 읽는 책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이 들었고 취침시간이 되어 일리히가 책을 내려놓고 불을 끄면 린네는 일리히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자기 침구를 좋아하는 고양이들도 있다지만 린네는 일리히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동거 후에 마련한 바구니와 폭신한 수건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현관문에 고양이 전용 출입구가 설치되었고, 일리히가 쓰는 침구는 털이 박히지 않는 툭툭한 면제품으로 바꿨다. 창고에는 고양이 전용 사료가 한 포대 생겼으며 빗도 추가되었다. 다행히 욕실용품은 일리히가 쓰고 있던 것도 순한 것이라 린네가 쓰기에도 문제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양이지만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 고양이인 덕에 린네는 장난감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일리히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는 거나 테이블에 드러눕는 모습을 보면 고양이다웠지만 낚시 장난감도 좋아하지 않고 쥐모양 인형은 거들떠도 안 봤다. 하기야 평소 업무가 쥐 사냥이었으니 실물도 아닌 인형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린네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일리히였다.


“확실히 자가가 이런 때 좋네요. 세 들어 살면 집 옮길 때는 편한데 대신 집을 마음대로 고치기가 어려우니까요.”


“복원하면 가능하잖아.”


“그게 어렵잖아요.”


고양이 급식소를 맡으면서 일리히의 교우관계는 이전보다 확연히 넓어졌다. 다른 급식소를 담당하는 봉사자들과도 인사만 주고 받다가 차츰 말을 섞고 가끔 함께 차를 마시자, 아는 사람들도 도서관 직원이나 도서관 단골 이용자들보다 더 넓어졌다. 이렇게 고양이는 일리히의 삶을 바꿨다.


“그보다, 혹시 고양이들이 사람 먹을 것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나요?”


찻잔 정리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일리히는 파이안에게 물었다. 도서관 근처의 고양이 쉼터를 오래 관리해왔던 파이안은 일리히와 린네가 동거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이번에도 좋은 답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고양이마다 다른데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는 종종 사람 먹을 것도 달라고 하거든. 개보다는 덜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성격차야. 우리집 네 마리도 한 녀석은 나 밥 먹을 때마다 빤히 보면서 달라고 하지만 다른 셋은 고기 먹을 때나 가끔 관심을 보여. 린네가 그래?”


파이안의 대답에 일리히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먹는 모든 먹을 것에 얼굴을 들이밀고 검수하더니 최근에는 먹으려고 하더라고요.”


“다?”


“다는 아니고 짠 음식은 냄새만 맡고 마는데 아침 식단은 관심이 많아요. 오늘 아침에도 오믈렛이랑 구운 채소 먹는데 오믈렛을 먹으려 들길래 밀어냈거든요. 어제의 요거트도 관심이 많았고, 그 전에는 코티지 치즈도 그렇고. 아. 저녁 먹을 때 맑은 국물이면 높은 확률로 달라붙어요.”


“특이하네. 뭐, 채식하는 고양이도 있으니 아주 특이한 건 아니지만 일단 네 음식에 관심을 보이는 건 좋아서 그런가 본데?”


파이안이 놀리자 일리히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업무처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린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매번 듣는 소리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보여준다는 것은 가슴 한 구석이 몽글몽글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라 그런가 싶었다.


그 뒤에도 꾸준히 관찰하며 깨달은 사실이지만 린네는 짜거나 매운 음식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매운 음식을 먹으려 할 때는 멀찍이 떨어졌고 짠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음식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먹을 때마다 식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는 모양이 그랬다. 대신 짠 음식이 나올 일이 드문 아침 식사는 꼭 참견했다.


“가장 많이 참견한 건 유제품이예요.”


“치즈?”


“크림치즈도 그렇지만 우유가 들어간 건 다요.”


오늘은 오후 느지막이 도서관 회의실에서 고양이 집사 모임을 가졌다. 원래는 업무 협조를 구하기 위한 회의였지만 예상보다 회의가 빨리 끝나자 그 뒤에는 고양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직원들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울 예정이라 서로 자연스레 흘러간 덕이었다. 그래서 일리히는 수첩을 꺼내들고 꾸준히 적어두었던 린네의 음식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같이 우유가 들어가도, 카레는 좋아하지 않는데 크림스튜나 크림수프, 하여간 크림소스가 들어간 음식은 다 관심이 있더라고요.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어하는 것은 크림치즈류고요. 지난번에 티라미수를 만들려고 마스카포네 크림을 꺼냈더니 내놓으라고 난리치더라고요. 주면 안된다고 해서 밀어냈더니 어제 아침에는 토라져서 나갈 때도 얼굴 안 보여줬어요.”


일리히는 말하면서 웃었지만 속은 쓰렸다. 항상 쫓아오던 시선이 어느 순간 돌아서서 외면하는 것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처음 만난 날은 우유를 주었지만, 수첩에는 우유는 소화를 못해 문제가 생기기 쉬우니 주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고, 그래서 아예 안 주려 했지만 가끔 유제품이 식탁에 오르면 참견하는 린네를 보며 미안한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안 될 음식에 끼어들 때는.”


일리히의 시무룩한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비키스트, 통칭 비키가 입을 열더니 살짝 뜸을 들였다.


“그럴 때는요?”


“인간이 되면 줄게.”


눈앞에 자신의 고양이 미미가 있는 것처럼, 비키는 훈계하는 어조로 말했다. 순간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과연. 고양이가 인간이 된다면 인간의 신체를 가지는 셈이니 특별한 문제없이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였다.


“근데 실제로도 케이스가 없지는 않아. 고양이가 인간이 된 경우. 장수족도 그렇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별로 티가 안나잖아. 고양이들 중에도 종종 인간으로 변신이 가능한 애들이 있다던걸. 도서관 고양이 중에서도 가끔 이야기 나왔고 학당 내에서도 몇 보고가 있긴 했어. 많지는 않지만.”


진제르는 장수족이며 도서관 고참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도서관 내 이용자 교육을 전담해왔던 터라 그런 이야기에 빠삭했다. 학당은 일반화하기 어려운 여러 특이사례들이 많이 모였고 관련 기록과 자료를 모으기 위해 도서관과 기록관이 협력하는 터라 쌓인 자료 규모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장수족이 많은 도서관 사서들은 각자 후임을 한 명씩 끼고 둘이 한 조로 활동하며, 그렇게 도서관의 지식과 정보를 전수해갔다. 그 자산들은 모두 이용자들에게 원활히 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르네는 그 크기부터가 특이한 걸요. 보통 고양이의 1.5배쯤 되는데 또 다른 고양잇과 동물은 아니고요. 분명 고양이는 고양이인데.”


“그래서 무거워요.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제 침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자다보니 들어 옮기려는데 무게가 상당해서 결국 포기하고 같이 잤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요즘에는 그냥 같이 자요.”


“아, 맞아. 고양이들이 꼭 침대 시트 좋은 건 알아가지고 말이지. 문제는 그 털인데…….”


“털이 문제죠.”


모여 있던 이들은 다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마법이 있다 한들 털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 해도 털 몇 올 쯤은 옷에 붙여 있고 어딘가에 굴러다니기 마련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건 결벽증이 있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고, 결국에는 고양이를 보내거나, 결벽증을 보내거나 양자 택일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깔끔떨며 청소하면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어요. 눈 감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결벽증으로 유명했지만 고양이 케리스를 들인 뒤 완벽한 청소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던 릴리스트는 웃음으로 정리하며 모임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약간 열이 오른다 싶은 낌새에 일리히는 후임에게 업무를 넘기고 조금 이른 퇴근을 서둘렀다. 몸 상태를 보니 오랜만에 불청객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서두른다고 해도 저녁거리 장까지 보고 나니 생각보다는 늦어져 아슬아슬하게 현관에 도착했을 때, 문을 닫고 나니 몸은 이미 줄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 내내 집에서 굴러다니다 마중 나온 르네의 눈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때보다 크고 동그랬다.


“아하하. 놀랐어?”


놀라다마다. 르네는 눈이 커진 것은 둘째치고 몸이 굳어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리히는 일단 신발을 벗고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을 하나씩 벗어 내렸다. 그리고 옷들과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한데 모아 끌어안고는 침실로 향했다. 그 때쯤에는 정신이 돌아온 르네도 안절부절 못하며 일리히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리고는 바른 자세로 일리히 옆에 앉아, 일리히가 옷 갈아입는 것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리히는 르네가 온 뒤로는 한 번도 연 적이 없었던, 그래서 르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평소 입던 옷과는 확연히 크기가 다른 옷들이 걸려 있었다.


“이럴 때 꺼내 입는 옷이야. 1년에 몇 번 정도 이러는데 딱 언제다 싶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이렇게 몸이 줄어들 때는 감기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해. 감기랑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눈치채거든. 오늘은 그래도 퇴근시간에 맞춰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도서관에 따로 둔 옷으로 갈아입고 퇴근했어야 하니까.”


일리히의 목소리 톤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아직 변성기가 오기 전인지 목소리의 톤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어린 모습의 일리히는 재잘거리는 것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이만 어려졌고 그나마도 아주 어려진 것이 아니라 2차 성징이 오기 전의 모습인데 그런 귀여운 반응이라 나름 즐기고 있었다.


“왜, 린네?”


아까보다는 진정했는지 동공크기는 아주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한 린네는 그 뒤로도 일리히의 발치에서 졸졸 쫓아 다녔다. 심지어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샤워하는 동안 욕실 앞 매트 위에 올라 앉아 야옹거리며 일리히를 기다리는 짓도 했다. 반응이 다르니 재미있기도 하고 많이 놀랐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저기 보이는 것은 보통 고양이가 아니다. 그러니 평소보다 닭고기 햄을 하나 더 건네는 일은 하면 안된다며 일리히는 애써 린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저녁식사 후 자리를 정리한 뒤 평소처럼 침대에 책을 들고 올라가자 린네도 냉큼 따라 올라왔다. 최근에는 발치에 자리를 잡더니 일리히의 몸집이 작아진 오늘은 바로 옆에서 잘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몸 위에 올라타 자려다가 숨이 막힌 일리히가 밀어내자 토라져서 발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은 일리히의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그대로 잠이 들었다. 원래도 일찍 잤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빨랐다. 그 뜨끈뜨끈한 열기가, 생명력이 다가오는 느낌이 참 묘해서 일리히도 평소보다 일찍 책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작아지면 일리히의 업무도 바뀐다. 작은 몸으로도 참고봉사를 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후임인 에이게르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한 달 쯤 옆에서 업무를 들여다 보았던 데다 오늘 전달할 사항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요일 패턴을 확인했을 때 오늘은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하루쯤은 맡겨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도서관으로 종종 걸음 쳤다. 아침부터 덩달아 일리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닌 린네는 그대로 따라서 출근했으며, 덩달아 도서관 로비 한 쪽, 참고정보 전용 데스크에서 일리히가 에이게르에게 아침 업무 사항을 전달하는 사이 천창으로 내려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물론 꼬리는 시계추처럼 따로 움직였다.


“오늘은 특별히 어려운 수업이 없으니까 정보 요청도 대개는 대응할 수 있을 거예요. 급한 일이 있으면 보내세요.”


도서관의 직원용 식별 카드는 목걸이처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고, 팔에 감아 두기도 하는 등 직원마다 다양하게 이용했지만 대개는 목에 걸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에이게르나 일리히도 도서관 이용자가 알아보기 쉽도록 목에 걸고 있었다. 일리히는 예비용으로 하나 두고 있던 작은 식별카드를 린네의 목에 걸어 주었다. 달랑 거리는 통에 린네가 몇 번 고개를 흔들어보더니 곧 익숙해진 듯,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게르는 잠시 미소를 띄웠다.


“함께 들어가시게요?”


“응. 신간 체크는 매번 하더라도 서가 둘러보는 걸 하지 않으면 또 정보 조합이 안되니까요.”


일리히는 아래쪽 서고에 있을 것이니 급한 일이 있으면 호출하라고 하고는 린네와 같이 종종걸음 치며 서고로 들어갔다.






학당의 도서관은 일반 열람실과 서고로 나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고의 규모가 훨씬 크며, 일반 열람실에서 5년 평균 이용률이 1회도 안 되는 도서는 서고로 옮긴다. 서고에서도 이용자가 찾는 책은 도로 열람실로 올라오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서고의 출입은 허가를 받은 일부 이용자를 제외하고는 사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서고로 들어오니 조용하다. 린네는 도서관 로비에서부터 일리히의 뒤를 따라왔지만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륜.”


마침 회의에서 나온 륜이 눈앞을 지나가길래 일리히는 륜을 불러 세웠다. 그제야 일리히에게 붙은 비인식마법 흔적을 발견한 륜은 마주 웃었다.


“이런. 꼬마구나.”


“린네도 같이 있어요.”


린네는 륜이 쉽지 않은지 슬쩍 몸을 빼고 일리히의 뒤에 숨어 있다가 들키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용이 된 이후에는 종종 그런 반응을 받았던 터라 륜은 익숙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시간 나는 김에 차 한 잔 하고 가지?”


일리히가 륜을 붙잡은 목적은 도서관 근무 장소의 일시 변경이었고, 륜은 일리히가 원하는 대로 잠시간 위층 참고봉사 담당자인 엘러퀴안을 참고봉사 주담당자로 임시 배치했다. 에이게르는 아직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일리히의 아래에서 몇 년 일을 배우고 단독 참고봉사를 시작한지 3년째인 엘러퀴안이 보조한다면 충분히 도서관 로비의 참고봉사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일리히가 언제쯤 다시 성인의 몸으로 돌아올지 모르니 임시 배치가 상당히 길어질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일주일간 상황을 보고는 그 뒤에 업무를 바꿀지 대비할 필요도 있었다.


“아니면 잠시 쉬어도 되지 않나. 유급휴가가 꽤 쌓였을 건데?”


“일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요. 도서관에 와도 일하러 오는 쪽이 즐거워요. 그래야 쉴 때 도서관에 오면 느긋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잠시 쉬라고 넌지시 건네는 말에 일리히는 살풋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이런 때가 아니면 린네랑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테고요.”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덕에 고양이는 닭고기 육포 한 덩이를, 꼬마는 차 한 잔과 큼직한 쿠키 한 조각을 얻어 먹고 흐뭇한 마음으로 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고는 책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라 여름에도 항상 서늘한 온도를 유지했다. 적정한 온도와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는 것은 책 보관의 기본이며, 조명도 마찬가지로 열람실보다 낮은 조도를 유지했다. 일리히는 서고 안에서 만난 다른 이용자들과 한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서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사이 린네는 서가 꼭대기 맨 윗부분을 탐험하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 참아가며 뒤를 쫓았다. 한 자리에서 오래 있는 것 같으면 그 근처 책장의 빈 공간을 찾아 몸을 말아 넣고 고양이 잠을 청했다. 한잠 자다 나오면 일리히는 서가를 따라 빙글뱅글 지그재고 움직여 저 멀리 가 있다. 린네가 일어나 발 딛는 소리를 들은 건지, 일어날 때면 살짝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서가 밖 통로로 얼굴을 내밀어 린네가 따라 올 수 있게 했다. 린네가 기지개를 쭉 켜고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면 일리히는 웃으며 맞아주었다. 린네도 신이 나서 일리히의 다리에 몸을 비비다가 눈높이의 책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냄새 맡기도 했다. 희한하게 여기저기에 다른 동물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 가끔 서고에도 고양이나 개들이 들어와. 쥐나 다른 동물들이 들어와 있는지 확인하고 가끔은 벌레로 훼손된 책을 찾기도 하고.”


물론 마법을 쓰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살충 마법은 해충과 익충을 가리지 않고 일괄적으로 죽이는데다가 자칫 책에 걸린 검색 마법 시스템, 세비아누와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어 아직은 쓰지 않았다. 사용할 때는 심각하게 벌레 먹은 책들만 골라서 살충마법을 돌리고, 다시 검색 술식을 걸고 나서야 서고로 돌아왔다. 책을 관리하는 마법들은 보수적인 성격의 사서들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검증을 거친 뒤에야 도서관에 들어왔다. 예외적인 것은 검색 마법 시스템인 세비아누였다. 걸려 있는 마법 자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간결하여 기존의 다른 마법들과 충돌하지 않으며, 처음에 도입할 당시에는 수많은 책들에 마법을 하나 하나 걸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한 번 도입한 뒤에는 유지 보수가 간결했다. 그 때문에 최초 제안자인 세비아누 이리스의 이름을 따서 시스템 자체가 세비아누라 불렸다.


“시스템이 발표되었을 때 륜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냐며 투덜댔지만. 그 다음에 투덜 댔던 건 책들에 마법을 거는 과정이었어. 도입은 빨리 했지만 책이 워낙 많으니까 작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거든. 그래도 새 책부터 마법을 걸어서 차근차근 확대하니까 다 끝나긴 하더라.”


평소라면 조용히 있었을 건데 들어주는 고양이가 있으니 일리히는 작지만 또랑또랑한 말소리로 재잘댔다. 서고에 들어온 것도 좋았지만 린네와 같이 들어와 누군가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좋았다. 그래서 살짝 들떠 있는 김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맴돌았다.


일리히가 하고 있는 작업은 보통 서가 탐색이라 부른다. 하지만 일리히는 서가 하나가 아니라 서고 전체를 훑고 있으니 서가 탐색보다는 서고 탐색으로 보는 것이 옳다. 특정 도서를 목적으로 하는 검색과는 달리, 탐색은 서가, 서고 내에 꽂힌 책들을 훑는 작업이다. 도서관의 책들은 들어올 때 책이 가진 주제에 따라 분류기호를 받고, 그 분류기호와 저자기호를 조합한 청구기호에 따라 서가에 꽂힌다. 청구기호는 모든 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분류기호 안에서는 저자에 따라 책이 꽂힌다. 일리히의 서고 브라우징은 서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관심 있는 책은 목차를 확인해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꽂아 넣어 가면서 주제구조를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책에 더해 새로 들어온 책을 매번 확인하면서 이용자들에게 제공할 자료를 업데이트 하기도 하지만, 가끔 시간을 내어 이렇게 서가를 둘러보면서는 학자들의 요청, 수서 담당 사서의 업무, 분류 담당 사서의 주제 부여에 따른 도서관 각 주제분야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들어온 책을 확인할 때는 일리히의 주제별 분류에 대한 견해가 가장 영향을 주지만 도서관 내 서가에 배열하는 것은 분류 담당 사서들의 업무이므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종종 전문 학자들의 요청에 따라 주제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 그런 정보도 꾸준히 갱신했다.


“궁금한 책이 있으면 말해. 꺼내줄게.”


복잡하게 말할 필요 없이, 이용자들이 요구하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가끔씩 그 정보들을 꺼내다가 재구조화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참고봉사를 쉴 때면 직접 서가에 올라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책들을 확인하고 머릿속에 든 서가 정보를 갱신하는 것이 일리히의 일이다. 물론 업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그냥 노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고, 업무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서가 여기저기를 훑는 것이 업무 예비 작업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그나마 일리히와 오래 일해 온 사서들이나, 자주 찾아오는 이용자들은 알아준다.


‘뭐라 해도 도서관은 단골 장사야.’


학당에서 도서관은 그 자체로도 존재 의미를 가지지만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이용하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더 자주 이용할 것이란 점은 자명했고, 이용하지 않는 이들은 앞으로도 이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어떤 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교수들과 사서들이었다. 학당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그건 진지하게 서가를 바라보는 저 고양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서가 탐색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차피 언제 몸이 돌아올지 모르니 일리히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린네도 적응한 모양이고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서 주제분야 업데이트 하는 것도 나름 좋았다. 에이게르에게는 업무 시간 시작하자마자 찾아가서 그 전날의 업무가 어땠는지 듣고, 질문을 받아 답변하며 가르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가닥이 있어 어렵지 않게 업무를 이어나갔지만 그래도 일리히만큼 방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보니 일리히와 연이 있던 학자들은 직접 일리히에게 답을 듣길 원했다. 그런 상담은 참고정보 공간 안쪽으로 있는 상담실에서 시간을 잡아 진행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다보니 린네는 일리히의 모든 활동에 함께했다. 처음에는 낯설어 했던 학자들도 며칠 지나니 슬슬 익숙해진 모양이라 고양이가 있건 말건 신경쓰지 않았다. 일리히가 가능하면 털이 날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철저하게 관리한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일주일 째.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난 일리히는 당황했다. 발치에 있어야 할 검은 고양이는 어디로 가고, 회색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몸집이나 체형은 린네와 닮았지만 털색은 확연히 달랐다. 그나마 눈을 떴을 때, 린네의 눈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다른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는 거야?”


일리히가 턱을 간질이며 묻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린네는 기지개를 죽 켜고 거울 앞에 다가갔다가 일주일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 한 번 석상이 되었다. 그 모습에 일리히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린네는 토라졌고, 아침밥을 챙겨 이름을 부를 때까지도 내내 뾰로통한 모습을 보였다.


낯선 모습이라 그런지 그날은 고양이 쉼터에 가는 동안 따라오지 않았다. 저녁 때 도서관으로 마중 나왔을 때는 평소와 다른 없는 검은 털이어서 안심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발견한 건 샴이었다. 특유의 털 색 때문에 몰라볼리 없었는데, 깨워 확인했을 때 눈만큼은 샴 고유의 하늘색이 아니라 린네의 녹색 섞인 노랑 눈이었다. 그 눈 덕에 더 특이해 보였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졌다. 항상 같이 다니다보니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던 에이게르도 그러려니 하던 통에 이상함을 못 느꼈고, 그나마도 이번에는 열흘만에 원래 나이대로 돌아온 덕에 제대로 휴가를 누리지도 못해 정신이 없었던 터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하여 그 며칠 뒤, 샴의 모습으로 변신한 린네가 고양이쉼터 회의 자리에 동석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놀라는 모양에 그제야 특이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기야 본인도 나이가 줄었다 늘었다 하는 판에 고양이가 종을 바꾼 것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겠지.”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어느 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일리히는 슬며시 웃으며 찻잔을 린네에게 가져다 댔다. 적당히 식은 것을 확인한 린네는 홀짝 거리며 민트티를 받아 마셨다.


원래의 모습 외에도 다양한 고양이로 변신하는 건 가능했지만 여전히 고양이는 고양이였기 때문에 아침의 유제품 관련 전투는 계속되었다. 하드치즈는 염분이 강해서 짠 냄새 때문인지 신경 안 쓰지만 소금이 거의 안 들어간 코티지치즈와 마스카포네 치즈에는 관심가지는 걸 넘어서 열광하던 떠올리면 입이 상당히 까다로운 고양이였다.


그런 연유에서 그 다음 두 주 정도는 아침 밥상머리에서 우유를 빤히 바라보는 린네의 시선을 견디다가, 그 다음 주부터는 우유를 밥상에서 제외했다. 어차피 점심 도시락으로 우유를 마시면 문제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침상을 차릴 때마다 린네의 우울한 눈매를 마주해야 했다. 결국 한 달쯤 버티다가 두 손 들고 린네 몫의 우유를 따라주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린네가 두 손 두 발을 들 차례였다. 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곧 유당분해효소가 없음을 배탈로 증명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먹기 이전으로 돌아가 그림의 떡을 보는 듯한 그윽한 눈길로 우유를 마주했다. 덕분에 일리히는 ‘인간이 되면 괜찮게 먹을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유제품은 시험해보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아침, 품안에 고양이귀를 달고 있는 꼬마가 안겨 있었을 때도 일리히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의 추정 연령대는 12세 정도. 일리히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정도였다. 흔들어 깨우자 줄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손으로 비비다가, 손을 확인하다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다가 긴 다리에 이불이 걸려 하마터면 그대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기다시피 가다가, 일리히의 도움으로 거울을 마주했다. 나란히 서보니 키는 일리히의 가슴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였다.


“린네, 소원 성취 하겠네.”


다리가 풀리는 린네의 허리를 잡아채 거울 앞에 앉혀주고 일리히는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침대를 짚고 다리를 움직이려 노력하는 린네가 보였다. 아무래도 네 다리로 걷다가 두 다리로만 중심잡고 걸으려 하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 번 휘청이더니 곧 균형을 잡고 안정적으로 걸었다. 두 다리로도 문제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자 기쁜 얼굴로 창문을 열고 이불 정리를 했다. 그리고 방을 나오려다가 도로 들어가 옷장문을 열었다. 그제야 알몸이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옷은 내가 작을 때 입는 옷 아무거나 골라도 돼.”


씻고 나온 일리히는 옷장 안쪽에 넣어두었던 새 속옷을 꺼내 주었다. 털이 있어 옷 입을 일이 전혀 없다가 매끈한 피부에 천을 걸치다보니 이모저모 낯선 모양이었다. 속옷을 입고는 불편한 듯 이리저리 몸을 틀다가 그럭저럭 적응되자 그 다음에는 통이 넓은 반바지와 넉넉한 크기의 긴팔티를 입었다.


출근하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고양이 귀의 인간모습을 한 린네가 옷을 다 챙겨 입은 걸 확인하고는 식탁으로 불렀다. 이전에는 그냥 식탁 위에 올라갔지만 이제는 의자에 앉아야 한다. 넓은 탁자라 다행이고 의자가 여러 개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일리히는 의자를 빼고는 불렀다. 그리고 잽싸게 달려온 린네를 앉히고 그 앞에 훈제 생선포를 넣은 죽과 우유 한 잔을 놓렸다.


“오늘은 어떨지 모르니 우유 마셔보자.”


우유를 보는 린네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린네가 인간으로 변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다양한 고양이로 변신하는 린네가 언젠가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수인형도 여럿 있으니 처음에는 고양이었다지만 인간으로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우유 마시는 걸 보면 정말로, 인간이 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드니까.’


소중히 두 손으로 우유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흐뭇한 마음에 절로 입가가 풀렸다.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다가 하마터면 아침 식사를 놓칠 뻔한 일리히는 시계를 확인하고 서둘러 아침을 챙겨 먹었다. 물론 죽을 떠오기 전에 린네에게 우유 한 잔을 더 따라주는 건 잊지 않았다.


인간으로 변한 린네는 죽도 잘 먹었다. 아마도 말린 생선으로 국물을 우려 끓인 죽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인간으로 변했으니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니 관찰할 요량으로 수첩에다 먹은 것들을 기록해두었다. 맛있게 아침 식사를 잘 먹은 린네는 나가기 전 잠시 머뭇거리더니 도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일 때 우유 먹은 걸 고양이 모습으로 소화시키는 건데 괜찮을까?”


짧은 침묵이 흐르고 뒤이어 린네가 대답했다.


“애옹.”


단호한 대답이어서 일리히는 웃고 넘어갔다.






그날 오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일리히는 바쁘게 움직였다. 미리 주문했던 침대 매트리스 추가분이 도착한 참이라, 린네의 도움을 받아 침실의 침구를 다 꺼내고 거기에 새 매트리스를 연결했다. 매트리스는 수지(樹脂)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라 확장이 자유로웠다. 새로 매트리스를 주문한 뒤 원래 매트리스의 옆에 수지와 아교를 섞어 만든 풀을 바르고 매트리스를 붙이면 끝이었다. 매트리스 받침대도 확장한 만큼 추가하여 이리저리 옮겨 정리했다. 둘이 작업하니 대략 한 시간 만에 침실 정리가 끝났다.


“침실에 탁자만 하나 놓길 잘했어. 덕분에 매트리스 더 놓을 자리가 있었네.”


“응.”


옷장에 있던 여러 이불 중 마음에 드는 초록 이불을 집어든 린네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일리히는 오늘 점심, 알렉세르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온 우유젤리와 동그랗게 자른 과일, 나타드코코를 섞어 우유를 부은 화채를 대접했다.


그 후로도 며칠간은 날마다 장보기가 반복되었다. 일리히의 옷이 있었지만 더 필요하다며 린네의 옷과 신발을 추가 구입하고, 컵이나 그릇, 집에서 쓰는 일상 용품들도 식구가 늘었으니 덩달아 늘어났다. 그리고 곧 인간형 린네에 대한 소문도 학당 내에 상당히 퍼졌다. 나비당 사람들은 모임이 있었던 그 날 오후에 바로 들었다.


“캐드펠 교수님이 제일 먼저 아셨지요. 그 날 점심 때 먼저 가서 말씀드렸거든요. 린네가 고양이 모습으로 출근했으니 거기까지는 모르실 것 같아서. 근데 점심 때 가자마자 인간으로 변해서는 우유를 조르고 있더라고요.”


그 당황한 캐드펠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라 일리히는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여기?”


“네.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렇네요. 하기야 린네 에르브의 인사관리카드에 인간형을 추가했으니 그 정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알았을거예요.”


그 열람 권한은 더 윗선이니 일반직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우유 좋아한다더니 진짜 열렬히 사랑했나 보다.”


웃음기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우유를 사랑하다 못해 고양이가 인간으로 변했다니, 이거 기록으로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등장하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음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일리히는 입가에 여전히 웃음을 매달고는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건데, 신맛이 돌지 않는 우유 간식이 뭐가 있을까요. 우유 외에 우유 디저트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거든요.”


“크림소스 계열은 다 가능하지 않아?”


“뭐, 그거야 당연하고요. 살짝 매콤하게 만든 크림소스도 곧잘 먹네요. 아주 매운 것은 무리지만. 산미도 아주 시큼한 발효 요거트는 안 먹고, 치즈도 짜거나 신맛이 강하면 손 안댑니다. 코티지치즈는 우유맛이 강하니 괜찮지만 크림치즈 중에서도 신맛 강한 것은 안먹어요.”


“까다롭네. 그러고 보니 마스카포네 치즈는 먹는다고 했지?”


“퍼먹지요.”


일리히의 한숨과 다른 사람의 웃음이 뒤섞였다.


“빙수는 어때요? 우유를 샤베트 얼리듯이 얼려서, 소르베 정도 되었을 때, 단팥을 섞는 거예요. 연유를 더 넣으면 우유맛도 강해지고 단맛도 더하고.”


“둘쎄데레체도 공방에서 팔걸요. 지난번에 우유잼이라며 나온 것 같던데. 그 왜, 원유를 오래 가열해 진득하게 만든 캐러멜 말이죠.”


“우유푸딩도 있잖아.”


“그건 이미 먹었어요. 마음에 들었는지 최근 며칠간은 자기 전에 꼬박꼬박 우유푸딩을 만들었고요. 이제 슬슬 레파토리를 바꿔야 할 거라 뭐가 좋을지 고민중이고요.”


일리히는 레시피를 적을 수첩을 아예 꺼내 들고는 체크하고 있었다. 수첩 하단에는 최근에 마지막으로 언제 먹었는지 연필로 적어두었다. 그래야 다양한 레시피를 돌려 먹일 수 있으니까.


“쌀푸딩도 우유맛이 강할거야. 거기에 건포도든 견과류든 섞어 줘도 좋을 거고. 아차, 초콜릿은 아직인가? 최근에 카카오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메타 차원의 창조주는 이곳을 특정 세계의 자료수집 공간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도 그 세계의 문화를 닮았다. 커피와 차문화는 초기부터 도입되었는데, 희한하게도 초콜릿만큼은 도입이 늦었다. 그간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콜릿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하던 소륜학당의 사람들은 최근에 야생 카카오나무를 발견하여 개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초콜릿 공방이 생기는 걸 고대하고 있었다.


“조만간 공방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재배지에서 학당에 우선적으로 공급하겠답니다. 캐드펠 교수님의 제자 중 한 명이 개량 작업에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열심히 받아 적던 일리히는 잠시 펜을 멈추고 대답했다.


“초콜릿은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 초콜릿은 개나 고양이에게 치명적인 성분이 있다는 내용을 어디서 봤는데.”


공방이 들어온다는 말에 들떠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간 얌전히 차만 홀짝이던 제로디안이 입을 열자 조용해졌다. 무엇보다 초콜릿은 처음 들어오는 디저트다보니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터였다.


“지금 린네에게 우유는 괜찮다지만 초콜릿은 어떨지 모르니까 경과 봐가며 조금 뒤에 먹여봐. 그리고 다른 집들도 초콜릿 먹는 것은 절대 주의할 것. 고양이들이 초콜릿 먹으면 매우 위험하니까 말야.”


다들 퇴근 후는 포기하고, 일과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초콜릿을 시도하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초콜릿도 괜찮은 게 확인되면 초코 우유로도 시도해보고. 그, 초콜릿보다 우유비중이 훨씬 높은 걸로. 그리고 딸기 우유는?”


초콜릿이야 그렇다 쳐도 딸기우유는 아직 줘보지 않았다. 우유가 메인이다보니 우유맛을 살리는 쪽에 집중해서, 바나나 우유나 초코 우유, 딸기 우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보통 그런 섞은 우유는 흰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딸기 우유는 신맛이 돌지만 이정도면 허용범위 안일 듯했다. 무엇보다 화채에 들어간 딸기도 잘 먹었으니까.


그렇게 받아 적은 우유 관련 디저트는 상당히 많았다. 달걀도 다양하게 조리가 가능하지만 우유로도 이렇게 많은 음식이 가능한가 싶었다. 가장 먼저 메뉴로 오른 것은 우유 찐빵과 타락죽이라, 이 둘을 먼저 시도하기로 했다. 타락죽을 괜찮게 먹으면 그 다음은 쌀푸딩이다.





린네 덕분에 소륜학당의 우유 소재 디저트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심지어는 달걀노른자는 빼고, 흰자만 사용한 시트에, 농축 연유를 더해 우유 맛이 아주 진하게 도는 크림을 넣어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도 등장했다. 린네를 위해 고안했다던 엔젤우유케이크는 당사자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일 맛있는 건 역시 우유 그 자체야.”


단호하게 말하는 린네를 보며 일리히는 그저 웃었다. 우유 공방에 들어오는 다양한 종류의 우유를 하나씩 다 맛보며, 린네는 고양이가 아니라 매우 행복하다는 얼굴을 했다. 일 할 때야 고양이지만, 사람으로 돌아오면 우유를 양껏 마실 수 있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젖소 종에 따른 우유 지방분과 영양분 분석 논문이 있어 출력해 보여줬더니 진지한 얼굴로 탐독하고는 하나씩 맛볼 수 있냐고 물은 참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종은 우유 제품이 따로 나온 것이 있어 구할 수 있었다.


“이것도 수요를 따르기 때문에, 안 팔리면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주문하면 다른 종류도 구할 수는 있다니 다행이다.”


아무래도 학당이 워낙 큰 고객이라 그런가, 개별 주문하면 맛볼 수 있을 만큼은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농장에 주문하면 바로는 아니더라도 구입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거기에, 각각의 우유도 그렇고, 각각의 우유푸딩도 만들어 본데다, 농장별로 달리 나오는 우유로 만드는 가열농축우유캐러멜도 하나씩 정복 중이었다. 둘쎄데레체, 우유과자라는 이름의 캐러멜은 대량의 우유를 오래 끓이거나, 고온고압의 솥에 넣고 가열하여 만드는 유당 캐러멜이었다. 그래도 단 것은 적당히 먹는 편이라, 큰 병이 아니라 작은 병으로 하나씩 사다 놓고 아침마다 서로 다른 둘쎄데레체를 빵집에서 갓 나온 우유식빵이나 브리오슈 등에 뿌려 먹으며 비교하는 노트를 채우는 것도 일이다. 캐드펠 교수의 연구 방식을 본 지 여러 해라,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지만 연구실고양이 몇 년에 간단한 관찰노트 작성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건 린네가 이상한 거야.”


나비당 동료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일리히 본인 역시 자각하고 있었다. 덩치도 원래부터 그랬지만 어디에든 저런 고양이는 없다. 특이한 것이 잔뜩 모인 학당에도 린네는 고유한 존재에 가깝다. 굳이 따지면 수인이지만 고양이 수인 중에서도 우유에 홀려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경우는 매우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태생적 수인이었을 테니까. 하기야 학당은 온갖 희한하고 이상한 것들이 모이는 것이니, 린네처럼 특별한 존재가 생긴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걱정되는 것은 원래 고양이인 린네가, 아무리 특이종이라고는 하지만 고양이의 수명을 따를 경우 일찍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다른 나비당 동료들은 앞서 나간 고민이라며 마구 웃었다.


“거꾸로 말야, 일리히.”


어느 날의 나비당 모임 때 진제르가 말했다.


“린네는 네가 다른 인간들처럼 일찍 죽을까 걱정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네가 장수족이란 걸 밝힌 적은 없지 않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날, 일리히는 저녁 후 우유타임 때, 린네를 붙들어 놓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은 장수족이니 매우 오래 산다고. 린네는 일리히가 뜬금없이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야기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일리히는 유리병의 우유 뚜껑을 경쾌하게 열었다. ‘뻥!’





린네가 집에 적응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일리히가 동거묘 혹은 동거인에 적응하는 속도도 빨랐다. 혼자 살던 기간이 매우 길었지만 누군가 들어오니 그것도 나름 좋았고, 무엇보다 린네는 원래 고양이라,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유 음식 먹는 것이고 그 외에는 의자나 쿠션, 이부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골골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양이 중에는 스파이더캣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집안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고, 실제 나비당의 터줏대감인 파블로바, 통칭 파비는 하도 활발하게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둘째인 스핑크스를 들이고서야 집사일이 줄었다고 했다. 둘째 이름이 스핑크스가 된 까닭은 짐작할 수 있듯이 첫째 이름을 날아다니는 인물로 했다가 후회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제로디안이 어느 날 일리히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서야 문득 깨달은 것도 있었다.


“혼자 살다가 동거인이 생기니 불편하지는 않아?”


기록관리학 특강을 맡아서 도서관사 자료를 정리하러 왔다던 제로디안이 던진 질문에 일리히는 곰곰이 생각하며 답했다.


“별로 불편하진 않아요. 아니, 불편하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는걸요.”


“그래도 몇 십 년을 혼자 살았는데 낯설지 않아?”


“……그러네요. 낯설 법도 한데.”


일리히는 겨울이라 밭일 안 가고, 햇빛 잘 드는 도서관 홀 한 가운데서 도서관 직원들이 마련한 방석을 깔고 누워 자는 린네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잘 맞나봅니다.”


“하기야.”


제로디안도 몇 대를 이어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록관 고양이로 키울 뿐이고 자신의 집에 들이지는 않았다. 나비당의 집사들 중에도 쉼터만 돌볼 뿐, 개인적인 집사를 맡지 않은 이들이 여럿 있었다. 고양이와의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나중에 잃었을 때가 걱정된다는 사서걱정파와,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나도영역파가 대부분이었다. 제로디안은 그 중 후자라 고양이를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제로디안의 말이 걸렸던 건지 일리히는 그날, 퇴근길부터 시작해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린네를 신경 쓰고 돌아보았다. 린네도 그 시선은 눈치 챈 듯 했지만, 린네는 평소대로 같이 돌아왔고, 씻고 나와서는 따끈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마셨으며, 저녁으로는 고소한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듬뿍 넣어 일리히와 함께 먹었다.


“린네.”


“응?”


평소처럼 거실에 깔린 러그에 앉아 책을 보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린네를 바라보길 여러 번, 일리히는 드디어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까지는 내내 혼자 살았잖아. 그냥 밖에서 돌아다니고, 마음 편하게 아무 데서나 자고. 가끔 내킬 때는 캐드펠 수사님의 오두막에 들어가고.”


“응?”


“나랑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아?”


린네는 읽던 셰익스피어 식물 화집에서 고개를 들고 일리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파악하고 싶었나, 린네는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응.”


아주 간단히 답해버린 린네는 기지개를 쭉 켬과 동시에 고양이로 변해 슬그머니 일리히의 옆으로 다가와 몸을 붙였다. 그리고 회색 러그에 검은 털을 뿜어내며 일리히의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골골 거리는 소리는 덤이었다.


“응, 그래.”


더 많은 것을 물을까도 생각했지만 서로가 불편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나중에 불편을 느끼면 서로 말하고 서로 조율하면 되는 것이고, 이제부터 차츰 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고양이 린네도, 인간인 린네도 동거인으로는 참 좋았다. 고양이 린네는 위로가 필요할 때 살짝 다가와 몸을 붙여왔고, 인간인 린네는 고양이보다는 존재감을 뚜렷하게 보이며 우유 간식 찾는 일 같이 재미있는 삶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앞으로는 어떨지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에 만족했다.








린네 에르브는 오늘도 우유를 먹고 마신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홍차를 조금 넣은 데운 우유와, 분유를 넣어 우유맛이 더 담뿍 감도는 우유식빵을 구워서, 갓 짠 우유를 지방분 걷어내지 않고 은근하게 가열해 만든 둘쎄데레체를 바른 것이다. 거기에 디저트는 약간의 단맛을 더해 조린 팥을 얹은 우유 푸딩. 오늘의 식단은 언제나 그렇듯 우유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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