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이야기는 아니라 올린 적 없는 오메가버스 + 가이드버스 배경 소설의 외전 같은 내용입니다. 본편은 BL로, 용어는 이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에트와르와 별지기(가이드)의 조합입니다.

브릿G의 스노우볼 이벤트 응모작입니다. A4 한 장을 조금 넘는 짧은 이야기지만 단번에 쓰는 건 오랜만이네요. 내년엔 조금 더 자주 써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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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은 눈이 흩날린다. 흩날린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게, 기록적인 폭설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는 눈 쏟아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전깃줄 위에도 눈이 쌓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일 날씨가 포근하다는 거네요.”
 “아마 내일이면 다 녹겠지.”

 녹는 건 녹는 것이지만, 이정도 폭설이면 한참 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 녹는 속도보다 내리는 속도, 쌓이는 속도가 빠를 것이다. 아마도 광화문에서 또 스키어가 등장하지 않을까.

 “스노보드는 평지에서 타기는 어려우니까요.”
 “서울 복판에서 크로스컨트리라.”

 따뜻한 라떼 한 잔씩을 손에 든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이에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지만 소파는 창 밖을 향하고 있는 터라 마주보고 있지는 않았다. 원래 에트와르와 가이드, 별과 별지기를 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니, 그래도 저랑 베키도 에트와르와 가이드니 문제 없잖아요?”
 “페어가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가이드라고 하기도 뭐하고.”

 베아트리체 위고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물리적인 초능력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능력을 지닌 에트와르들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그들을 지지하고 지탱하는 것은 깊은 연대로 묶인 가이드들. 능력의 조율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연대까지 하다보니 얕게는 정신적 파트너, 깊게는 배우자나 반려로 함께 지내기 마련이다. 베아트리체는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로, 에트와르였던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능력 전이가 일어나 에트와르로서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가이드였다. 가이드가 에트와르의 능력을 함께 공유하는 건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지만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반려와 함께 그 능력이 꽃피듯 개화하여 가이드이자 에트와르로서 활동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려가 사망한 뒤에도 에트와르로서의 능력은 그대로 남고 가이드로서의 활동도 가능하였기에, 지금은 FDI(Foundation D’etoiles Internationales)에서 가이드의 총 관리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다보니 실무진으로서의 활약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더 힘이 될 수 있는 현역 활동을 자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우자가 남긴 아이를 키우고, 아이가 자라 또 가족을 이루고 손자까지 보다보니 요즘에는 예전과는 달리 이런 풍경을 보고 조금 감성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괜찮아요. 뭐, 감상적인 반응을 보이면 어떤가요. 가끔은 뒤를 돌아보며 쉬셔도 좋을 나이잖아요.”
 “아직은 일러. 아직 환갑 조금 넘겼을 뿐이라고.”
 “네네, 올해 한국나이로는 예순 다섯이시지요. 아직 대중교통 무료탑승 안될 나이십니다.”

 진경이 정확하게 찔러오자 베아트리체는 조용히 라떼를 마셨다.

 “그 분이랑 눈이랑 무슨 이벤트라도 있으셨나요? 청혼이라거나?”
 “그런 건 없었어.”

 진경의 질문에 특별히 염색하지 않아 흰색과 회색이 뒤섞인 머리칼을 귀에 살짝 꽂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이 함께 한 사람이니 뭘 보든 생각 안 날 수 없잖아. 감상적이 된다는 건,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자주 펼쳐든다는 거야.”
 “그러면 또 어떤가요. 앨범 꺼내 보는 것과도 비슷한 것을.”

 진경은 대답하며 잠시 카페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 다른 손님들은 없었고, 계산대를 맡은 모리나 라떼아트에 몰두한 보현이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상담가로서의 업무를 빼먹을 수는 없으니, 대화 도중에 틈틈이 둘러보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수월하게 읽어내는 에트와르로서의 능력이 이럴 때는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둘러본다 해도, 모르는 사람은 카페 매니저가 둘러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아는 사람들은 업무중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다.

 “나랑 대화하면서 잠시 쉬겠다더니 또 일?”

 베아트리체의 핀잔에 진경은 살짝 웃었다.

 “그야, 업무 시간이니 꾸준히 둘러봐야지요.”

 대답에 살짝 눈을 흘기며 베아트리체는 다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하여간 한국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드물대요. 뭐, 이번도 크리스마스 전에 내리는 눈이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남산이나 궁들은 눈이 금방 녹지는 않을 테니 명동성당이나 혜화동성당 같은 곳은 하얀 장식으로 성탄을 맞이하겠네요.”
 “응, 그럴거야.”

 꾸준히 가야하지만 몇 번 미사를 못간 것에 대한 보속은 마쳤고, 이제 정결하게 1년 중 가장 큰 성탄 미사에 참여하면 된다. 세례명인 그 이름대로 베아트리체는 모태신자였다. 그렇다보니 성탄을 장식하는 이 눈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 치우는 것은 나이 많은 그녀 몫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쯤 손자들이나 조카들은 다들 나서서 성당 주변의 눈 치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계셨네요.”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제레미였다. 일 때문에 본부에 온다더니 업무가 끝난 모양이었다.

 “성당에 눈 치우는 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와서 먼저 가볼게요. 저녁 즈음에는 눈 그친다니 그 때까지는 여기 계세요.”

 “나도 같이 가서 치워도 되는데?”
 “아침에 감기기운 있다고 하셨잖아요? 눈 치우는 거 돕다가 감기 걸리면 안돼요.”

 단호하게 말하며 웃음과 함께 퇴장하는 제레미를 보는 베아트리체의 눈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진경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컸네요.”
 “응, 잘 컸어. 애들도 그렇고.”

 가족 단체 메신저를 보니 제레미의 딸 크리스, 그리고 제레미의 가이드인 요한의 딸 마리아 모두 오늘 눈 치우는 일에 참석할 모양이다. 자신의 별은 아들과 가이드만 남기고 떠나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으니 지금의 풍경을 보면 더더욱 부러워할 것이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눈을 바라보는 사이 인기척이 났다. 빈 머그 두 개를 반납하러 갔던 진경이, 이번에는 쟁반에 무언가를 담아왔다.

 “단팥죽이랑 런던포그예요.”
 “오!”

 잊고 있었지만 오늘은 동지였다. 1년 중 가장 해가 짧은 날이니 한국의 풍습대로 팥죽을 먹어야 하는 날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참이었다.

 “보현이 어제 준비했다고, 오늘 아침 카페에서 살짝 끓여 준비했어요.”

 진경이 내려놓는 팥죽에는 팥 몇 알을 고명으로 얹었다. 거기에 달달한 단풍나무시럽향과 얼그레이의 향이 뒤섞어 올라오는 잔이 함께 놓이니, 아침에 느꼈던 감기 기운도, 창 밖의 추운 풍경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고마워, 잘 먹을게.”

 오늘의 동지, 크리스마스 전전날도 포근하게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베아트리체는 심술궂은 미소를 띄우며 생각했다.

 ‘그러니 더 부러워하라고요. 저는 여기서 더 즐겁게 보내다 갈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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