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본문과 관련이 아마도 없습니다...?



아침에 운동하면서는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이 많이 떠오르는데, 운동 끝내고 나면 그 생각들이 모두 날아가서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지난 주 중에 떠올랐던 생각 중 하나를 끄집어 냅니다. 제목하여 여적여.



최근 알라딘에서 구매한 로맨스소설은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그나마 성공한 것은 조아라에서 연재되던 소설을 구입한 경우였고 그 중에서도 몇은 또 지뢰였습니다.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블로그에 기록이 없어서 긴가민가 하며 구입한 소설은 구입을 후회했습니다. 읽다가 연재처를 옮겨 연재한 것은 반타작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습니다.



최근에 구입한 로맨스 소설 중 종이책 방출 없이 붙들고 있겠다 생각한 건 『시그리드』 뿐인가 봅니다. 『역지사지』도 나쁘진 않은데 이건 망설이는 중이고요. 왜 그런가, 삭제했거나 방출한 책들과 보유 중이고 돌려 보는 소설을 곰곰히 짚어보다가 떠오른 것들을 끄적여 봅니다.




트위터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듯 본 이야기 중에 악녀에 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녀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모처의 공식을 형상화한 인물입니다. 조아라에서 보았던 여러 로맨스판타지소설들에서는 악녀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강 나눠보면,


1.차원이동자 주인공과 악녀

이전에는 차원이동한 주인공, 그리고 원래 그 세계에 살고 있던 귀족 영애의 대립 구도를 만들면서 주인공은 선, 귀족 영애는 악의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보통은 주인공이 차원이동해서 판타지세계에 들어가며, 그 세계의 귀족 영애가 악녀 역을 맡아 남자주인공을 두고 다툽니다.


2.차원이동 빙의자 주인공과 악녀

주인공이 혼만 날아가 소설 속 주인공 또는 판타지 세계의 귀족영애에게 빙의합니다. 귀족 영애의 기억을 갖고 있다와 아니다의 두 경우가 있으며, 악녀도 원래 주인공의 몸을 가진 이를 괴롭히던 인물인 경우와 빙의자가 활동하면서 악녀와 충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귀족영애와 차원이동 악녀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소재입니다. 차원이동자가 성녀, 귀족영애가 악녀라는 클리셰를 한 번 비튼 겁니다. 차원이동해서 성녀로 추앙받는 존재가 사실은 악녀이며, 귀족영애는 거기에 휘말려 괴롭힘을 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조아라에서 30편 남짓의 단편으로 연재되었던 소설에서 가장 먼저 보았던 기억이 있으며 그 내용은 꿈도 희망도 없는 전멸이었습니다.(...)



차원이동자나 빙의자가 아니라 환생자인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도 비슷합니다. 종종 환생자와 차원이동자의 대결(...)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지금 서가에 남아 있는 책 중 위의 클리셰에 해당되는 것은 없습니다. 남아 있는 책은 악녀보다는 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입니다.



『역지사지』가 남은 이유는 위의 분류 중 3번에 해당하지만 악이 오롯이 차원이동자에게 가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아침 운동하면서 내린 결론이 이거였습니다.

엘은 차원이동자로 나타난 성녀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잃습니다. 성녀는 먼저 공작가에 들어와 양녀가 되어, 공작가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엘의 지위를 위협합니다. 그 다음에는 엘의 약혼자와 예비 구혼자인 사람들을 포섭하고 엘을 악으로 몰아갑니다. 결국 마지막 사건을 통해, 엘은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친구들에게서 냉대와 외면을 받으며 친부모님께 내쳐 길거리로 쫓겨납니다. 스승이 주워준 덕분에 죽지는 않았지만 진짜 스튁스의 물길을 보고 왔을 겁니다. 그나마 스승님 덕에 홀로 설 수 있고 절치부심하여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었지요.

복수에 대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나, 복수의 대상들은 엘을 버렸던 인물 모두입니다. 공작 부처와 전 약혼자인 황태자, 그리고 친우였던 공작, 백작, 현자 등등까지, 모두 제국을 이끌 차세대로 조명받았던 이들입니다. 악녀도 대상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 온지 3년 만에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으며, 돌아가기 직전에 자신이 그간 벌인 짓을 폭로하고 떠나갑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짓에 놀아났던 이들이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가 되어 주저앉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이라 짐작할 따름입니다. 그 덕에 엘을 버렸던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엘을 찾아 나서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하여간 악녀에게 복수할 방법은 더 찾아야 하니 일단 미루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가장 아끼는 것을 빼앗고 내주지 않는 것으로 복수합니다.


즉, 엘의 복수는 흔히 나타나듯 악녀를 사교계에서 매장시키거나 집안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엘은 자신의 능력으로 협상을 하며, 협상의 퀘스트들을 자신의 힘으로 훌륭하게 해결하며 '나는 당신들이 보호하고 끼고 살던 이전의 인물이 아님'을 내보입니다. 변했기 때문에 이전의 관계는 같은 방식으로 회복할 수 없으며,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전과 같이 친교를 이어 나가기에는 엘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보물이 되었지요. 그 역시 엘의 능력에서 연유합니다.



『시그리드』는 애초에 반동인물이 없습니다. 『역지사지』는 엘의 반동인물로 성녀를 놓고 있지만 『시그리드』는 아예 없지요. 굳이 표현하자면 베라무드가 반동인물에 가깝지만 조금 다릅니다. 아니, 가장 큰 반동인물은 어떤 의미에서 황제일 겁니다.

시그리드는 회귀한 뒤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서 죽지 않기 위해 하나씩 바꿔 나갈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2권에서 나오듯, 나비효과로 인해 제국의 미래 자체도 완전히 바뀝니다. 이전에는 황제에게 협력하여 기계처럼 활동했고 쓸모가 다한 뒤에는 버림 받았지만, 돌아온 뒤에는 기억하는 사건들 속에서 사람들을 가능한 살리고 돕기 위해 노력하며 힘을 갈고 닦습니다. 가치관의 문제가 있었을 뿐, 사람 자체는 바르고 곧은 인물이라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삽니다. 그러니 삶뿐만 아니라 역사가 바뀔 수 있었지요. 



어느 쪽이건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갈아 엎어야 하는 인물은 그냥 사람입니다. 해를 끼치고 나쁜 짓을 한 인물이 있을 뿐입니다. 아이패드와 서가에 남은 책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요.'ㅅ'





그런 의미에서 저 그림 대로,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열심히 책을 읽겠습니다. 결론이 이상하지만 원래 취미생활이란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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