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쉬트 가는 오래된 공작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우성알파로만 대를 이은 집안으로 또한 유명하다. 비쉬트가 우성알파로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 우성알파의 특질 때문이기도 하다. 알파와 오메가의 특질은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별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나, 단 하나 예외가 있다. 마녀는 모두가 우성알파이며, 마녀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우성알파이다. 그리고 이 우성알파는 반드시 마녀다. 여성 우성알파의 자식은 알파건 오메가건 관계없이 우성이 나올 확률이 남성 우성알파보다 높은 편이나, 우성알파의 존재가 통계적 연구가 가능할 정도로 많지 않은데다 우성알파들은 자식의 수도 많지 않다.


 마녀들은 우성알파 중에서도 특이 케이스로 볼 수 있으며 특히 딸은 반드시 마녀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대부분의 마녀 연구는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바, 공개된 것은 비쉬트 가의 혈족 연구뿐이다. 비쉬트 가의 사례연구는 아예 연구자들이 대를 이어서 진행하는 가계 프로젝트로 이루어지며, 처음에는 비쉬트 가 자체적으로 진행했지만 현재는 국가 주도의 연구재단에서 지원을 받는다. 처음에는 우성알파의 존재를 추적하여 더 많은 우성 형질을 낳기 이한 용도로 국가에서 주도하였지만 형질에 따른 관리가 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많아지자 가계 연구나 단순 추적 연구의 형태로 바뀌어다. 비쉬트 가에 대한 연구는 유전적 연구 외에도 마녀라는 집단과 존재의 계보 연구도 함께 하여 역사학과 유전학의 통합 연구로도 유명하다.


 “그냥 눈이 가더라.”


 그는 건넨 찻잔을 받아 들며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무릎 위에 찻잔받침을 얹고는 한 모금 홀짝이고 있노라니 혼잣말 같은 독백이 연이어 튀어 나왔다.


 “애초에 난 아기 낳을 생각이 없고, 그러니 오메가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베타를 좋아할 줄은.”


 고개를 숙였다가,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눈이 간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는 계속 눈으로 쫓고만 있단 말야.”


 다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아으!”


 마지막의 절규를 끝으로 감정폭발이 소강상태가 될 것으로 보여, 그는 다 마신 찻잔을 내밀었다. 역시 알아서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진한 수색이라 우유를 한 큰술 섞었다. 녹차에 우유를 넣는다니 희한한 입맛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유 섞는 것도 나름 즐길만 했다.


 “그냥 데이트 신청하고, 정말로 괜찮다 싶으면…….”


 얼굴로 날아오는 시선이 느껴져 그는 그대로 고개를 들고는 방어했다.


 “나보고 낳아오라는 말은 하지마. 난 할 생각 없어.”
 “알아, 아니까….”


 다시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광분하다가 다시 좌절하다가. 애초에 데이트 신청도 교제 신청도 하지 않았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일인극과 함께 구구절절 풀어 놓고 있는 걸 보면 흥분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해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모두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 그저 다 털어내고 자신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맡은 역은 방관자이고 관객이다. 영명한 이 분은 이 극을 멋지게 해결할 능력이 있다.
 예상했던 대로 10분쯤 뒤에는 진정된 모양인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이 보였고 식은 차를 맛없다면서 한 입에 털어 넣은 뒤에는 한숨과 함께 다음 단계를 내놓았다.


 “일단 데이트부터 신청할래.”
 “그래라. 다음에 만날 때면 결과 나오겠지?”
 “아마도.”


 해탈한 목소리였다. 20분 동안 쏟아 냈다고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앞이 아니면 이런 모습은 보일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도 고개를 끄덕여 이해한다는 몸짓을 보였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한다는 생각은 했다. 페넬로페는 공작이고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 비체스는 대대로 마녀가 공작이었으며 자신도 마녀다. 비체스가 공작이 되고, 공작가가 되고, 공작의 영지를 받은 것은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살아남은 마녀들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차별들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 상징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다음 후계자도 마녀를 두어야 하며 그럴려면 집안을 뒤져 마녀를 찾거나 마녀인 양자를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대대로 공작들이 그러했듯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 것이나 페넬로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일이 더 소중했고 아기보다 우선했다. 자신이 아기를 낳지 않아도 배우자가 낳는다면 문제는 없다. 따라서 오메가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상호합의하에 최근 확대되고 있는 인공수정시술을 한다. 이것이 올리비에를 만나기 전의 생각이었다. 이 모든 계획이 무너진 건 그야말로 눈이 갔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올리비에가 혼자 있는 것은 확인했다. 보좌관인 레이몬다 밀런은 집사와 협의할 것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올리비에는 올해의 장부 결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리도 거의 끝낸 모양이라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올리비에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펴자 페넬로페는 기다리지 않은 척, 열린 문 사이를 슬쩍 들어가 문을 두드렸다.


 “어, 공작님.”


 잠시 긴장이 풀려 있던 몸은 다시 뻣뻣해졌다. 아직은 어려운 모양이라 생각하며 페넬로페는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장부 결산 중이었나보지?”
 “예, 마무리 작업까지 끝내서 이제 제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말을 고르며 머뭇거렸던 그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혹시 차 좋아하나?”


 좋아하는 것은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다. 홍차를 좋아하며, 새로 열린 찻집은 나중에라도 한 번씩 다 방문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마침 이번에 찻집 하나가 내부 공사 후 개장한다고 하여 예약을 잡아 놓은 터였다. 예상했던 대로 올리비에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홍차를 제일 즐기지만 차라면 관계없이 대부분 다 좋아합니다.”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서 홍차향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끝을 은은하게 스치는 향. 무의식중에 주변을 훑었지만 홍차는 없었다. 장부가 있어서 혹시 젖을까 그랬는지 책상 위에는 빈 컵마저도 없었다.


 “음? 뭐 찾으십니까?”
 “아, 아니, 갑자기 홍차향이 나는 것 같아서. 착각인가.”


 페넬로페의 말에 올리비에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제 페로몬일 겁니다. 가끔 흥분하면 조절을 못해서요.”
 “페로몬?”


 ‘페로몬? 페로몬이라고?’


 대답을 듣는 순간 페넬로페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어, 그러니까 내가 온 것은, 그러니까, 이번에 동백아가씨가 재개장을 한다 해서, 같이, 음. 가자고.”


 말을 계속할수록 홍차향이 점점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올리비에의 표정은 점점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페넬로페의 말이 끝나고 적막이 몇 초간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데이트 신청이라고 이해하면….”
 “아니, 데이트 신청은 아니고, 아냐, 맞아. 원래는 데이트 신청하고 좀 더 알아갔으면 했는데….”


 말이 꼬이면서 점점 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트 신청이 아니고 그 다음 단계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 번 더 상황은 꼬였다.


 “했는데라고 말씀하시는 건….”


 올리비에 역시 적당한 단어를 찾기 어려운 모양인지 말꼬리를 흐렸다.


 “아냐, 중요한 건 데이트가 아니니까. 결혼이지.”


 사고쳤다. 말이 튀어나온 순간 페넬로페는 등 뒤에 식은땀이 솟는 것을 느끼며 자학했다. 평소에는 이런 성격이 아닌데, 정확하게 말을 전달하고 확실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상관이지만 데이트 신청하는데 이렇게 진땀을 빼는 건 이상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의 원흉은 페로몬이었다. 베타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터라 페로몬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 그 자체가 실례되는 행동이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 못했던 것이지만.


 “그거,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 신청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까.”


 안 좋은 쪽으로 마구 뻗어 나가던 생각은 올리비에의 말에 순간 멈췄다. 가지를 뻗어 나가던 자괴감이 도로 착착 접혀 상자 속에 쏙 들어가 밀봉되었다.


 “……응.”


 정리하면 그렇다.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차츰 알아 나가면서 하면 된다. 일단은 데이트부터.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한 데이트.


 첫 번째 데이트 약속은 정신을 차린 페넬로페가 앞서 말한 동백아가씨의 재개장에 맞춘 예약일로 잡았다. 둘 다 급한 일은 해치워 놓고 편한 마음으로 가자고 약속했던 터라, 그 사실을 몰랐던 보좌관 레이몬다가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며 좋아한 건 덤이었다. 첫 데이트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해서 페넬로페는 외부 일정 후 약속 장소에 가기로, 올리비에는 그날 휴가를 마치고 나가기로 했다. 다만 부담가질 필요 없다고 페넬로페가 먼저 선을 그은 터라 복장은 찻집에 어울리는 간편한 복장으로 말을 맞췄다. 정장이 아니라 그보다 가벼운 차림, 갈색의 긴 바지에 차이나 칼라의 흰셔츠였다. 페넬로페도 그와 비슷하게 발목 가까이 오는 긴 치마와 셔츠를 챙겨입고 있었다. 서로 마주할 일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었지만 주문할 음료와 디저트에 대해 말문을 트면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라지만 그런 문제에 신경을 안 쓰는 페넬로페와, 그런 페넬로페를 알고 있는 올리비에는 찻집에 놀러온 일행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 개인적인 일을 묻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어느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어떤 것이 궁금하신가요?”


 직원이 우려 내온 포트를 기울여 차를 따르며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말을 고르던 페넬로페는 포트를 내려 놓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페로몬, 홍차향인가요?”
 “아, 네.”


 더 무서운 질문인 줄 알고 긴장했던 모양인지 올리비에는 빙긋 웃으며 긍정했다.


 “그렇다면 오메가……?”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 하기야, 원서에 그 내용은 적는 곳이 없었지요.”


 올리비에는 취직 전에 적어 냈던 서류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확실히 공작가에서 제출을 요구한 서류에는 형질을 묻는 내용이 없었으며, 공작가 의료실을 담당하는 직원 주치의는 알고 있었겠지만 그런 개인 정보는 엄중히 관리되고 있으니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보고가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작가는 그런 개인정보의 관리 문제는 엄격했다.


 “열성오메가라 향이 짙지는 않지만 홍차향입니다. 아마도 실론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다즐링은 아닐거예요.”


 ‘열성오메가.’


 페넬로페는 올리비에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왜 자신이 베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열성오메가라면 히트사이클의 주기도 몇 달 간격으로 길다보니 휴가를 내더라도 눈치챌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향도 약하고, 페로몬 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베타로 착각할 정도였다. 우성오메가는 페로몬 우성알파와 비슷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훨씬 더 강하고 히트사이클의 주기가 훨씬 짧기 때문에 눈치채기도 쉬웠다. 애초에 우성 인자를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레 알아차리기 쉬웠다.


 “솔직히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 때 횡설수설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건 당황해서 였습니다.”
 “네?”
 “베타라고 생각했거든요.”


 올리비에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 갈무리를 잘한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보다는 원망에 가깝죠.”
 “네?”


 페넬로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투덜댔다.


 “오메가인줄 알았으면 고백 진즉에 했을 겁니다. 베타인줄 알아서 한참을 망설였고요.”


 궁금증이 어린 올리비에의 얼굴을 보고 페넬로페는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올리비에의 페로몬 향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새콤한 향이 코 끝에 다가왔다.


 “전 임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후계자는 얻어야 하니까 인공수정에 동의하는 오메가를 배우자로 맞을 생각을 했지요.”


 페넬로페가 우성알파이고 마녀다보니 페넬로페가 낳는 여아는 무조건 우성알파다. 지금까지 앞선 공작들이 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페넬로페가 알파나 베타의 배우자를 맞아 당연히 아기를 낳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성알파라 해도 여성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없었다.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개 보조적 기구 등을 이용하여 임신에 성공한 결과이고, 그 수도 사례 보고가 될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이 발달하면서 실험실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하여 이를 오메가의 태에 착상시키는 일도 많았다. 이 덕분에 남성 알파간의 결합을 제외하고, 태를 갖고 있는 쌍인 남성과 여성, 오메가와 알파간의 다른 모든 조합은 아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여성 알파라면 오메가가 아니라 남성과 배우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아연한 얼굴로 대답하던 올리비에는 말을 되짚어 보고 퍼뜩 시선을 맞췄다. 이 말인 즉, 그 이전부터 자신을 배우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본인의 뜻을 꺾고 스스로 임신할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페넬로페의 간접 고백에 올리비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가릴 셈인지 올리비에가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더 직접적으로 고백할까요. 지난번에 이미 이야기하긴 했지만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습니다.”


 올리비에의 얼굴은 찻잔으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이 보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 못할 페넬로페는 아니었다. 하지만 직접 말로 듣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 그럼에도 페넬로페가 올리비에에게서 직접 답을 들은 것은 그보다 훨씬 뒤에, 얇은 반지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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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해도 우성알파인 페넬로페는 미인이다. 올리비에에게는 경애의 대상이었을 것.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일찌감치 공작가를 이끌어온 인물이며 관리자적 측면이나 본인의 업무적 능력, 개인적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 자신은 그렇기 때문에 호감은 있어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상황.

바라만 보던 인물이 프로포즈를 해왔을 때, 상대의 손을 잡아도 될 것인지 고민하는 부분은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대부분의 로맨스소설이 그러하듯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ㅁ-/ 무엇보다 먼저 반한 쪽은 페넬로페고, 프로포즈도 페넬로페가 먼저 했고, 그만큼 가장 아껴줄 것이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할리킹. 아니, 확실한 할리킹.



올리비에의 이름은 한창 제 트위터 타임라인에 올라온 섬의 궤적 등장인물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보다 훨씬 앞서 『황금박차의 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따옴. 같은 올리비에지만 이쪽은 더 평범하고 평온한 삶을 보낼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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