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부제를 넣은 것이 아니라 책 제목이 저렇습니다. 한국에는 1권인 이 소설만 나왔는데 일본에는 뒤에 두 권이 더 있답니다. 읽다보면 두 권이 더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목은 저렇고 장르는 추리소설이지만 일단 주요 소재 중 하나가 로맨스입니다. 정말로요. 정말 아닌 것 같지만 로맨스 맞습니다.

원래 서가 서핑을 하다가 찾은 책입니다. 원래는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인 줄 알고 집어 들었다가 나중에야 전혀 다른 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찾고 나서 보니 이 책이 애거서 크리스티 탄생 120주년을 맞아 영국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이랑 일본 하야카와 기보시 문학진흥재단, 하야카와쇼보가 손을 잡고 2010년에 새로 만든 상이랍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1회 수상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못지 않게 풋풋한 로맨스의 분위기가 풍깁니다. 다만 이 로맨스의 분위기는 추리와 현학과 철학과 미학 사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이 책의 강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요. 현학과 철학과 미학을 걷어내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로맨스라 그게 오히려 소설의 맛을 가릴 수도 있고, 위의 것에 취하다보면 로맨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마지막 편을 보고 나면 손발이 오글거려 "내가 왜 이걸 크리스마스 시즌에 붙잡고 있는거야!"라는 좌절 섞인 비명을 지릅니다.


검정고양이는 나이 스물넷의 대학교수입니다. 동갑인 나는 박사과정 학생이며 대학 동기이기도 한 검정고양이의 조수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학과장만 아니면 검정고양이 같이 까탈스러운 인간의 조수(조교)를 할 일이 없지요. 하지만 그대로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고 학과장인 모 교수님이 조수를 맡아달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떠 맡았습니다.
검정고양이라는 것은 학과장이 그에게 붙인 별명인데, 스물넷이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것은 학과장이 논문에 홀딱 반해 강력하게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다른 사람들의 토가 달리지 않을 정도로 검정고양이는 유능합니다. 그리고 교수로 올라서게 된 계기였던 그 논문의 제목은 『베르그송의 도식으로 본 말라르메』. 어, 저는 둘다 이름만 들었지 누군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크흑.;ㅂ;

읽다보면 나는 검정고양이에게 열등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만약 둘의 성별이 같았다면 더 심하게 나타났을 텐데 검정고양이는 턱시도 고양이라 불리는 검정+흰색 조합의 고양이를 떠올릴 정도로 검은 슈트에 흰셔츠 차림으로 다니는 남자, 나는 그보다는 조금 더 캐주얼하게 입거나 종종 어머니의 정장을 훔쳐(!) 입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그렇다보니 열등감이라 해도 심각하게 나타나진 않고 오히려 일종의 부러움이나 존경 비슷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일반적인 클리셰지요. 탐정역의 인물(만화에서는 자주 남자)와 사건을 물어오는 인물(만화에서는 자주 여자). 다만 이 분위기가 참으로 묘하다는게. 게다가 나의 입장에서 기술하기 때문에 잘은 안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주인공도 굉장한 수재입니다. 옆에 검정고양이가 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나이 스물넷에 박사과정 1년차, 게다가 학과장도 기대하고 있다고 할 정도면 나름 독보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니까요.


하여간 B님은 이 책을 원서로 보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 아마도. 장담은 못하겠네요. 철학이나 건축 등의 다양한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라 원서가 나을지, 번역이 나을지 감이 안옵니다. 번역은 매끄럽게 잘한 편입니다. 아마도 검정고양이의 별명은 쿠로네코이지 않을까 하는데, 이걸 굳이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검정고양이라 한 것은 책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 테마가 에드거 앨런 포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책에 실린 각 장의 이야기는 포의 유명한 작품을 모티브로 썼기 때문에 『검은 고양이』도 주요한 코드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헷갈리지 말라고 일부러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B님께 권하는 건 첫 머리의 이야기 소재가 건축과 미술쪽이라서 입니다. 조명도 등장하네요. 포이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아니라 파리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긴 하지만 뭐,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ㅅ+


모리 아키마로.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이기웅 옮김. 포레(문학동네), 2013, 12000원.

이런. 포레가 문학동네의 임프린트였군요.'ㅂ' 어쩐지 역자가...;...



한줄결론. 나는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괜찮을지는 확신이 안섬.OTL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