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한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쪽 연구를 했는지는 그 사람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 사회학쪽 연구자였을겁니다. 이 연구자는 남편과 함께 오지(중국 연안)에 들어갔고 남편이 연구를 하는 동안 자신도 원래 계획대로 연구를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대로 사건은 도서관에서 시작됩니다.

도서관에서 그녀는 영어 원서의 대출카드에 낯선 이의 이름이 적힌걸 봅니다. 그 오지에서 영어 원서를 읽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출카드를 보고 있자니 궁금했겠지요? 그래서 그녀는 그 사람을 찾습니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훤칠한 키에 중국인이라면 일반적으로 상상할 그런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나봅니다. 그 사람의 행적을 보면 상당한 두뇌를 가지고 있고 행동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그 당시 정치적으로 몰려 있었고 죽음을 각오한채 연안에 들어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였을겁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본래 하려던 연구를 접은 채 어두운 동굴에서 호롱불 하나 켜놓고 그와 마주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그녀는 약속한 대로 그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발표합니다. 처음에는 반향이 거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이야기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미국에서 발표되었던 책은 57년에 일본에서 출간되며 굉장한 연구적 가치를 지닌 책이란 말을 듣습니다.


-ㅂ-


연구자는 님 웨일즈(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 남편은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그린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 그는 장지락입니다. 님 웨일즈가 쓴 책의 제목은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이고요. 원래 이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손이 안가서 망설이다가 위의 이야기를 듣고는 급속히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책에는 김산이라고 등장하지만 가명입니다. 일부러 가명을 쓰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책 내에서 여기저기 바꿔서 일부러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이 발표된 뒤에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구구절절한 말이 많았는데 김일성이 김산은 장지락이다라고 하여 밝혀졌다고 합니다. 장지락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고 하고요.

듣고 있자니 러브레터와 귀를 기울이면은 풋내가 납니다.(...) 중국 공산당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남편과 함께 대장정의 종착지인 중국 연안에 온 헬렌은 1937년에 이 기록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서는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계속 독신으로 살지요. 장지락은 한국인이었는데 이 사람의 어릴적 행적을 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상당한 인텔리입니다. 일본 유학도 다녀오고 중국 유학도 했고. 거기에 중국에서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의학부 공부도 하고 경제학 공부도 했답니다. 그 당시 대학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지금의 대학원 수준?-였다니까 굉장한 사람인거죠.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조선의 독립운동, 중국 공산당 이야기 등을 세세하게 들었을텐데, 머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도 보여준 사람이 자신의 입에서 생생한 말을 뽑아낸다면 어느 연구자가 넘어가지 않겠습니까.(게다가 잘생겼다는 듯?;)
장지락은 1938년에 처형당합니다. 그의 아내는 이후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키웠다 하고요. 나중에 헬렌 스노우가 그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당신의 아버지는 절대 스파이가 아니다, 누명이다라고 하여 아들이 재조사 청원인가를 냈답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에서 복권했다는군요. <아리랑~>을 읽었어야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 쓸 수 있을텐데 저는 그 당시 이야기는 지나치게 취할까 두려워 읽지를 못합니다. 흑;

하여간 처음에 책이 나왔을 때는 그리 반응이 없었는데, 57년에 일본에서 나온 다음에는 상당히 말이 있었나봅니다. 중국 공산당 내부 자료가 아니라 조금은 바깥에서 본 자료이기도 하고 실제 활동한 사람의 생생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으니까 사료적 가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산당"이야기이기 때문에 계속 나오지 못하다가 87년에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냅니다. 출판사 사장님은 책을 낸 다음 안기부에 여러 번 다녀오셨다던데.-ㅁ-;


올 겨울에 날 잡아서 이불 뒤집어 쓰고 종일 읽을겁니다. +ㅅ+
겨울의 할 일 목록도 죽 잡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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