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둘러보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블루 캐슬이란 책이 있는 걸 봤습니다. 무슨 책인가 싶어 대강 넘겨 보았더니 동서문화사에서 ANNE'S BOOKS라는 이름아래 묶어 낸 시리즈 아홉 번째, 「밸런시 로망스」와 같은 책입니다. ANNE'S BOOKS 중에서 가장 자주 읽은 것이 「밸런시 로망스」라, 책도 작은 편이고 해서 빌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상당히 후회했습니다. 제목에 적었듯이 번역의 문제이지요.

애니메이션이나 외국 드라마를 볼 때도 그렇지만 번역도 가끔은 그럽니다. 먼저 눈에, 먼저 귀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빙판을 먼저 보면 원판 목소리가 귀에 익지 않아 낯설게, 이상하게 들리고 같은 더빙판도 먼저 들은 성우가 누구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립니다.

번역도 조금은 그런 경향이 있을겁니다. 먼저 읽은 번역이 더 익숙해서 주인공의 말투가 바뀐다거나 하면 이건 좀 아니다라고 투덜대는 겁니다.


하지만 이번 번역은 그런 문제를 초월합니다.
읽으면서, 이 책은 영어판을 가지고 번역한게 아니라 일본어판을 가지고 번역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이상한 장면이 들어 있어 그렇습니다. 말투는 둘째치고 사람들간의 대화가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를 돌봐주러 왔다는 말에 밸런시에게 감사를 표하는 시시의 말입니다.


<동서문화사판>
"정말로 있어 줄 거야? 나, 너무 외로웠어. 내 한 몸은 어떻게 할 수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아!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아.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주다니……. 너 같은 사람이! 넌 언제나 날 친절하게 대해주었어.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베텔스만판>
"진담이세요? 저, 정말…… 외로웠어요. 내 한 몸은 스스로 간수할 수 있지만…… 하지만 너무 외로웠어요. 언니 가은 분하고 같이 있을 수 있다니 마치…… 마치 천국 같아요. 예전에 언니는…… 제게 잘 해주셨죠."


같은 책인지 의문이 들만한 부분이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동서문화사판>
밸런시는 시시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갑자기 가슴이 행복으로 벅차올랐다. 이곳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는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는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베텔스만판>
밸런시는 시시를 힘주어 안았다. 그녀는 문뜩 행복해졌다. 여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녀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쓸모없는 노처녀가 아니다. 책으로 치자면 항상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던 장은 드디어 끝났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장의 시작이다.



베텔스만판의 '문뜩'은 제 오타가 아닙니다. 베텔스만에서 나온 책에는 몇 군데 오타가 있습니다.
오타는 넘기더라도 의역과 직역이 눈에 보인다 싶은 정도입니다. 원서를 봐야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있겠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원서에서 시시가 밸런시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을 거란 점은 확신합니다.-ㅅ-  베텔스만판이 일어판을 번역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그래서 드는 겁니다. 동서문화사판에 따르면 조지애나는 사촌인데, 베텔스만판에서는 조지애나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게다가 제임스 숙부의 농담들도 베텔스만 판은 번역을 한 것이 아니라 바꿔놓았습니다. 베텔스만판 48쪽, 동서문화사판 42쪽에 실려 있는 농담을 보면 확연히 차이납니다.

그리고 시시의 아버지인 아벨을 동서문화사판에서는 '욕쟁이 아벨', 베텔스만판에서는 '울부짖는 아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도 차이가 있고요.

베텔스만판에 불만을 가진 것은 대체적인 말투가 현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밸런시가 집에서 나가는 장면에, 자신의 사촌인 스티클스에게 퍼부은 악담도 차이가 납니다. 동서문화사에서는 '거지 같은 할망구!', 베텔스만 판에서는 '쳇, 진짜 욕나오게 만드네'.
음...;



동서문화사 번역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베텔스만판은 다음부터는 손대지 않을겁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밸런시 로망스」, 동서문화사, 2004
루시 모드 몽고메리, 「블루 캐슬」, 베텔스만, 20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