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영화를 많이 보는군요. 예년에는 보통 한 해 한 편 감상하고 끝이었는데, 2007년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초속 5센티미터, 귀를 기울이면, 골든 에이지, 그리고 기억 안나는 몇 편을 더 봤습니다.(아마도)
원래는 좀더 느긋하게 쓰려고 했는데 오늘 오후에 출장이 있고 업무가 밀려 있어 일단 달려봅니다.


골든 에이지는 예고편을 보고 홀딱 반한 경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도 그랬지만 그건 원래 보려고 결정했던 것이고, 골든 에이지는 예고편의 케이트 블란쳇과 의상,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반해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예약을 못하고 볼까 말까를 고민하던 때, 빠순심이라는 단어를 써서 포스팅을 해준 모님 덕분에 그 날 집에 가서 바로 일요일 조조로 예약하고 봤습니다.
CGV의 예약 결재 중 KB 포인트리가 있어서 포인트 결재로 한데다, 티켓을 끊으니 포인트 3천점 추가에 팝콘 작은 것 무료가 걸려서 아이디를 빌려준 G에게도 보답을 했지요. 훗훗.


한줄로 요약하자면, 두 시간이 짧았습니다. 재미가 덜한 영화를 볼 때면 중간에 몇 번이고 시계를 보게 되던데 이쪽은 시계를 볼 틈도 없이 열심히 봤습니다.
하지만 100% 맛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피튀기는 모습이 난무하는 앞의 몇몇 장면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봤습니다. 예수회의 모습, 그리고 고문 장면,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까지. 전쟁 장면이 오히려 덜 참혹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부분은 취향에 안 맞았지요. 이런 장면이 없었다면 밋밋했을지도 모르고, 이런 장면이 들어가 항상 좋은 것만으로 좋은 국가를 만들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건에 대해 여왕이 반대하고 고뇌하던 부분은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것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직접 보았을지 어땠을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죽음이 그녀에게 끼쳤을 영향은 대단했을테니까요.

영화 전반에 대한 마스터의 평에도 공감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어디까지나 들러리입니다.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라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는 찾아봐야겠지만, 그 꼬마 아가씨의 미모에 펠리페 2세가 팍 묻혀 버리는군요. 특히 "영국의 여왕이 될래?"라는 아버지의 말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이사벨라의 모습은 그 몇 백년 전, 영국에서 땅가지고 싸움을 했던 누구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미지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의 그 2.5등신 캐릭터들이지만, 맨날 비오고 침침한 구석에 있는 땅을 줬다고 투덜대던 누구 말이죠. 이사벨라의 얼굴이 딱, "나한테 그 미개한 땅을 다스리라고?"라는 표정이어서 말입니다. 거기에 무적함대 침몰 후 덩달아 침몰하는 펠리페 2세의 모습. 새침한 얼굴로 "아빠는 그것밖에 안돼요?"라고 온몸으로 말하며 돌아서는 이사벨라가 정말 예뻐 보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발이 당근색인 것도 의도적인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대체적으로 당근색-붉은색 머리는 성격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타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요. 서양에서의 이미지가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 본래의 금발 머리를 짧게 쳐서 그 위에 당근색 가발을 쓰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다 E자가 붙은 앤에게 흑판으로 머리를 얻어 맞지...;)

그리고 복식들.
제일 화려한 것은 역시 엘리자베스. 보는 내내 여왕님의 옷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여왕님이 고뇌하고 방황하는 중반부의 옷들은 초반부처럼 다채롭지 않습니다. 짙은 푸른색, blue, 우울의 색인가봅니다. 내내 얼굴 표정도 그렇더군요. 그리고 굉장히 나이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왕으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당당하게 서 있을 때는 옷도 그렇고 얼굴 표정도 갤라드리엘 마님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 라일리(롤리)와의 삼각관계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요, 당당한 여왕으로 거듭나기 위한 모습이라 생각하렵니다. 그 부분을 참고 보면 맨 마지막에 아기에게 축복을 주려는 때의 자태로 다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흑흑흑. 옷도 멋지고 당당하시고 피부도 매끈해서 그야말로 여왕님이세요.

케이트 블란쳇.
이 영화를 보면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요.
올랜도도 반지의 제왕도, 나니아 연대기도, 콘스탄틴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전작에서의 이미지가 강하면 다음 작품에서 그 이미지를 벗어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데 이 누님은 다릅니다. 정말로, 정말로, 여왕님이십니다. 글로 표현하기는 참 어렵지만 그 때 그 때의 엘리자베스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얼굴도 나이들어 보였다가, 당당해보였다가, 고뇌에 잠겼다가 한 여자가 되었다가 합니다. 당당하고 위엄있기만 한 여왕이 아니라 꼬장꼬장한 virgin queen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잘 표현했다 생각합니다.
보는 내내 심취해 있었다니까요. 훗훗훗.


이 영화가 엘리자베스 연작 영화의 두 번째 편이라 들었습니다. 3편은 아마 제임스 스튜어트의 이야기도 나오겠지요. 어떤 영화가 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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