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라고 하면 슬픈 노래가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사전을 찾아서 나오는 만가는 挽歌라고 씁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책표지에 나온 대로 靑春輓歌입니다. 한자가 약간 다릅니다. 한자사전에서 확인하면 輓은 끌다와 슬픈노래라는 양쪽의 뜻이 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애도하는 노랫가락을 가리키는 挽歌 역시 輓歌로 쓸 수 있는 겁니다.

이 소설은 그 중의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다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지요.


오메가버스 세계관의 BL이기는 하나, 19금이 아닙니다. 일반으로 나왔고요. 제대로 된 키스신도 아니고 베드신도 아침짹에 가까운 묘사로 넘어가지만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창현과 지수, 이 둘에게는 그런 담백한 분위기가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은 창현입니다. 보통 로맨스소설은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BL은 수건 공이건 둘 중 한 쪽이 주인공이고 다른 쪽은 주연급 조연이나 조연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지수의 이야기보다는 창현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창현의 이야기가 주인 것은 제목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청춘만가라는 제목은 창현의 20여년 삶을 가리키는 輓歌이기도 하고, 소설 클라이막스의 상황에 대한 挽歌이기도 합니다. 그 둘 다 창현의 이야기이며 지수는 창현의 삶을 지켜보고 지탱하는 지팡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개연성이 가장 없는 부분이라면 이 지팡이가 보통의 나무도 아니고, 나무로 치면 티크. 나무가 아니라 조금 더 멀리 보면 티타늄, 그것도 다이아몬드 세공을 한 지팡이란데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할리킹의 또 다른 변형입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로맨스소설 시리즈인 할리퀸은 BL에서는 단어를 바꿔 할리킹이라 불립니다. 흔히 신데렐라 스토리를 두고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신데렐라는 백작가의 딸이었고, 그것도 정식 결혼에서 나온 적자입니다. 소녀시절까지는 고급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요. 그러니 신분은 충분했고 최근 몇 년 간의 상황이 문제였을 겁니다. 할리퀸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이 많으니 보통은 재산상의 차이를 언급합니다. 할리퀸이 그런 이야기라면, 할리킹은 BL에서 같은 상황을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한쪽은 부자, 다른 한 쪽은 가난한 경우. 그게 아니더라도 대체적으로 사회적 배경이 차이 나는 경우를 두고 할리킹이라 말합니다.


이 소설이 할리킹인 것은 지수가 매우 부유한 집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막내다보니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집도 자식의 의사를 상당히 존중하는 분위기라 특별히 제지가 없습니다. 거기에 재산이 상당히 많음에도 창현 주변에 있을 때는 그렇게 티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몇몇 장면을 곰씹어보면 야가 부잣집 아이가 맞구나 싶습니다. 걷다가 전화를 걸면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으니 최소한 막내인 지수에게도 별도로 차와 기사가 붙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막내인 지수가 면허를 딴 것은 소설 내에서 살짝 언급되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다니는 듯하고요. 거기에 막판에 등장하는 별장들은. 음. 이거 모마녀님이 홀딱 반할만한 그런 별장이었지요.



빙글빙글 돌았으니 소설 내용으로 돌아가봅니다.


대학교 3학년인 창현은 과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민성의 요청으로 개강파티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나오는 길, 1학년 신입생인 지수와 동행합니다.

지수는 창현을 입학하기 전부터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방황하던 시기에 우연히 마주쳤고 꾸준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학교를 선택하고 과를 선택한 것도 창현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관심을 넘어서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걸 충분히 깨닫고 있습니다.

창현은 과내에서 아웃사이더입니다. 항상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며 혼자서만 다니고 성적도 꽤 좋습니다. 열성 오메가에 다리가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모저모,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형은 전신불수이며 어린 여동생과 알콜 중독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생계 책임도 창현의 몫이라, 수업 외에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럼에도 성적은 상위권이랍니다. 그런 창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여유가 없어보이고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반한 쪽은 지수니까요.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쫓아다닙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런 지수의 노력이 창현을 끌어올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과 학업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에 지쳐있던 창현은 지수를 거부하지만, 결국은 지수가 이깁니다. 다만 지수가 그냥 이긴 것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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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수는 저이의 삶이 이렇게까지 자신과 다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어깨를 누르고 있는 고단함만 좀 치워 주면 그걸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지만, 실제로 지수와 창현이 살아가는 세계는 완전히 달랐다. 지수는 자신이 창현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창현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쫓아다닙니다. 그러다 우연히 창현의 개인사와 얽히고, 밀어냈던 창현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며 절감합니다. 내가 부잣집이니 뭔가 도움을 주면 더 나아 질 것이라 생각하던 것은 매우 안이했다고,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 뒤 지수의 역할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창현의 지팡이입니다. 창현을 끌어내 어떻게든 쉴 수 있게 해보려 하고, 창현이 부담을 갖지 않게 이모저모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하고.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니 그렇게 지팡이 역할을 자처합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고급 나무에 티타늄과 다이아몬드를 쓴 것으로 모자라, 인공지능과, 네비게이션과 자동주행 기능을 탑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인 보조 역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창현을 끌어주니까요.



오메가버스의 세계관은 이 소설에서 소품으로 사용됩니다. 창현의 힘든 상황을 묘사할 때, 지수와 창현이 얽히는 여러 사건들의 소재, 그리고 마지막의 키포인트로 작용하는 것까지. 오메가버스 세계관의 소설을 꽤 여럿 읽었지만 이렇게 담담하게 쓰일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이런 쪽이 취향이기도 하고요. 베드신이 없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견.'ㅂ'a




다른 것보다 창현의 고단함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만성피로로 지쳐있을 때, 나 역시 힘들다 생각할 때가 절로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挽歌구나 싶다가도 소설이 진행되면서도 같이 힐링되는 느낌.

저야 지수 같은 반려를 얻을 가능성이 매우 낮으니, 저를 구하는 것은 저 혼자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 부지런히 돈 모으겠습니다.(먼산)



이미누. 『청춘만가』. 시크노블, 2018, 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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